[루이 누구인가] 10살 입문…세계 첫 여류9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루이나이웨이(芮乃偉)9단은 1963년 상하이(上海) 태생이다.

10세 때 바둑을 배워 17세 때 중국 국가팀의 대표가 됐다.

중국 여자바둑을 4연패하고 88년엔 세계 최초의 여자 9단이 돼 승승장구하던 芮9단은 90년 돌연 중국을 떠나게 된다.

그의 애인이자 중국 바둑계의 떠오르는 별이던 장주주(江鑄久)9단이 천안문 사태 때 시위 피켓을 들었고 그 여파로 미국으로 가버리자 芮9단도 중국을 떠난 것이다.

芮9단은 그러나 일본으로 갔다.

함께 사는 것보다 먹고 사는 일이 급해 일본의 바둑대회에 참가할 자격부터 얻고 싶었던 것이다.

일본은 芮9단의 실력이 너무 강해 여류바둑을 석권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때부터 이들은 '그라운드' 를 잃고 일본.미국.한국을 전전하는 떠돌이 기사가 된다.

92년 대만의 잉창치(應昌基)가 應씨배 세계바둑대회 본선에 이들을 초청했고, 이들은 대회에 앞서 도쿄(東京)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결혼식이라기보다 출정식에 가까운 비장한 분위기였다.

중국은 대회를 보이콧하고 한명도 출전시키지 않았다.

이 대회에서 芮9단은 이창호9단 등 한국.일본의 강호들을 연파하며 준결승까지 진출해 세계를 놀라게 한다.

李9단은 당시 "바둑둘 맛을 잃었다" 고 말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는데 이 후유증이 이번 국수전의 패배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芮9단 부부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자리잡고 바둑 보급에 전념했으나 1국에 10~20달러 하는 지도대국만으로는 생활이 쉽지 않았고 무엇보다 프로기사로서 시합바둑을 두지 못하는 아픔을 달랠 길이 없었다.

이들의 구원자로 나선 이가 미국에서 프로기사 협회를 조직해 초대 회장이 되었던 차민수4단. 한국에 이들을 받아달라는 편지를 계속 보내는 한편 중국에 프로기전을 만들고 비용을 대는 등 중국과 이들 부부의 관계 개선에도 앞장섰다.

한국에선 조훈현9단.김인9단 등이 芮9단 부부의 한국행을 적극 지지했다.

일본이 과거 세계 최강일 때 누구나 받아들였듯 이제 한국이 그 일을 해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특히 曹9단은 芮9단과 사문이 같고 그녀의 사숙이 된다.

曹9단은 우칭위안(吳淸源)9단과 함께 일본의 세고에 겐사쿠(懶越憲作)9단의 제자인데 芮9단은 吳9단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芮9단이 한국에 오게 된 데는 한국 젊은 여성기사들의 패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부분이 10대인 이들은 芮9단의 한국행을 오히려 환영했고 오늘은 지더라도 내일은 이길 수 있다며 오히려 남성기사들을 설득했다.

10년간 방랑 끝에 芮9단 부부는 99년 4월 한국에 왔고 芮9단은 이해 여성 최초로 승률 1위를 기록하는 대활약을 보인다.

한국에 온 뒤 "바둑을 두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요" 라고 말하던 芮9단은 자신의 소원 이상을 달성했다.

박치문 전문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