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백야행’ 주인공 맡은 고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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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는 “오랜만에 카메라 앞에 서니 어색하고 생소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점점 그 상황을 즐기게 됐다”고 말했다. [김성룡 기자]

섣불리 했다 본전도 못 찾는 배역이 있다. 연기 자체가 ‘모험’인 그런 역할 말이다. 영화 ‘백야행’의 살인자 요한도 거기에 낀다.

요한은 어린 시절 친아버지를 죽인다. 이후 여러 번의 살인과 심지어 성폭행마저 저지른다. 그가 악의 존재가 된 건 어이없게도 사랑 때문이다. 그 사랑은 여자를 환한 태양 아래 살게 해주며 자신을 암흑에 가두는 그림자의 사랑이다. 여자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힐 것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요한은 미심쩍어하면서도 “네가 꿈꾸는 미래가 무엇이든 끝까지 지켜주겠다”고 다짐한다. ‘헌신’이라는 말로는 채 설명할 수 없는 이 눈먼 사랑을, ‘인간의 얼굴을 한 살인자’가 돼 보여주기란 그 어떤 배우에게도 쉽지 않아 보인다.

‘백야행’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고수(31) 역시 압도당했다. 살인용의자의 딸과 피해자의 아들이 14년에 걸쳐 얽히는 비극적 사랑. ‘와, 이건 정말…’하는 감탄밖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제가 접했던 어떤 작품과도 소재나 구성 면에서 전혀 다른 얘기였어요. 충격적이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고…. 그렇게 사랑하는데 14년간 만나지 못하고 끝까지 여자에게 삶을 온통 바치는 이 남자를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막막했죠.” 나오키상 수상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원작이나 드라마는 일부러 보지 않았다.

◆“이틀에 한번 잠자며 요한이 됐어요”=대신 그는 “요한이 됐다”. “대사도 거의 없고 표정과 눈빛만 쓸 수 있는 상황이었죠. 기술적으로 뭔가를 표현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요한으로 사는 것, 그래서 요한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이었죠.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일부러 어둠 속에서 살아봤어요. 집에선 하루 종일 커튼을 쳐놔 햇빛을 가렸어요. 밖에 나가야 할 일이 있으면 해가 진 후에 나갔죠. 어두운 색 옷만 입어보기도 하고, 가급적 바닥만 쳐다봤어요.”

요한의 심정을 글로 써보기도 했다. ‘나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저질렀다. 그때 그 일이 날 잠 못 이루게 한다’같은. 요한이 가위로 종이를 오려 만드는 태양도 자주 만들어봤다.

“그러다 보니 정말 잠을 잘 수 없는 거에요. 마음이 편치 않아서요. 석 달 간 이틀에 한 번 꼴로 잔 것 같아요. 힘들었죠. 저도 여행 다니는 거 좋아하고 밝은 태양 아래 나가고 싶은데, 나중엔 사람 눈을 잘 못 맞출 정도였죠. 그거 아세요? 너무 외로우니까 나중엔 길가에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도 반가운 거.”(웃음)

◆상대 역 손예진과도 “말 섞지 말자”=상대 역인 미호를 연기한 손예진과도 첫 만남에서 약속했다. “인사는 생략하자고 했어요. 편해지면 농담도 하게 되고 그게 연기에 드러날 테니까.” 그는 요한을 “불쌍한 친구”라고 표현했다. “죄책감으로 인해 한 순간의 편안함을 자신에게 허락할 수 없는 남자죠. 힘들다고 남들처럼 숨쉬는 일반인의 삶이 요한에겐 허락되지 않아요. 그래서 저도 길거리를 전력 질주하는 장면이나 베드신에서도 호흡을 많이 참았어요.”

그는 인터뷰에서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꺼냈다. 강남구청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했던 군 생활, 3년 넘게 이어진 공백이 가져다 준 좋은 변화라고 했다. “연예인 생활은 행동반경도 좁고 화초처럼 길러지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아요. 처음 1년 정도는 너무 힘들어서 마음의 벽을 쌓았던 것 같아요. 그러다 점점 마음을 열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세상은 정말 넓고, 사람은 저마다 작은 우주를 갖고 있는 존재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됐어요. 인물에 접근하는 방식이나 연기하는 마음가짐을 많이 바꿔준 것 같아요.” 그에게 진정성이란 인물의 바닥까지 가 닿고 싶은 남다른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요한이라는 쉽지 않은 ‘모험’을 끝낸 그의 표정은 한결 깊고 여유로워 보였다.

기선민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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