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뉴스] 파산선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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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굴비상자에서 나온

2억원에서는 심한

비린내가 났을 거야.

그렇잖음 왜 돈 들어왔다

자진신고 했겠어?

그러게 뇌물 바쳤다가

경을 치게 된 업체는

생각 잘못한 거지.

사과나 오렌지 상자를

꽉 채워 갖다 바쳤으면

조용했을지도 모르잖아?

요새 같은 세상에 '겨우'

2억원 받고 뇌물 먹었다는

소리 듣고 싶겠느냐고.

요즘 제 아버지 빚

2억여원 물려받고

파산신청 했다는

여덟살짜리 있잖아.

면책이 될 거 같다니

정말 다행이지.

그 애가 김치공장 하다

외환위기 때 부도내고

숨진 제 아버지 빚에

무슨 책임이 있겠어?

책임이라면 필시,

뇌물 따위 생각도 못하고

살았을, 그러다 망해 암에

걸려 빚만 남기고 가버린

제 아버지한테 있겠지.

또 1997년 외환위기 만들어

숱한 가장들을 파산시킨

그 어떤 이들한테 있고.

어쨌든 죄없는 애를

면책하는 건 당연한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경제불황이라는 암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한

그들에 대한 면책도

당연한가? 아님 누가

책임지긴 했던가?

굴비냄새 날 돈다발이

멀리서 아른거려서인지

도무지 기억이 안 나네.

*숨진 아버지가 진 2억원대의 빚을 떠안은 여덟살짜리 남자 어린이가 법원에서 파산선고를 받았다. 그 어린이는 현재 면책심리를 받고 있다.

송은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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