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영화 세트장 같은 초현실적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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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휠러가 2002년 5월 2주 동안 북한 여행을 하기 위해 중국 베이징에서 타고 갈평양행 기차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 제공=론리 플래닛]

‘배낭여행의 아버지’도 북한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매년 600만권 이상이 팔리는 세계적 여행안내서인 ‘론리 플래닛’ 시리즈를 만든 토니 휠러(62) 이야기다. 세계 구석구석을 자유로이 여행해온 그에게 여행가이드를 따라다니는 소위 ‘패키지 투어’는 전혀 체질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북한에서만큼은 예외였다. 2002년 5월 2주간 북한을 여행하면서 그는 북한인 안내원을 따라다니고 지정된 곳에서만 사진을 찍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최근 e-메일 인터뷰에서 북한을 “지금껏 다닌 나라들 중 가장 흥미로운 나라”라고 표현했다. 그의 북한 여행기를 담은 『나쁜 나라들』한국어판(안그라픽스)이 최근 출간됐다. 영문판(『Bad Lands』)은 2007년 나왔다. 북한을 포함해 아프가니스탄·미얀마·이라크·쿠바 등 미국 입장에서 문제가 많은 9개국을 여행한 기록이다.

휠러는 “지금껏 다닌 나라 숫자가 140개쯤 될 것”이라며 “북한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공간과 개성만 다를 뿐 그래도 같은 차원의 나라였는데 비해 북한은 아예 차원이 달랐다”라고 떠올렸다. 생활 양식에서 사고 방식까지 모든 것이 너무도 달라서 "4차원, 아니 5차원에 존재하는, 이상한 앨리스의 나라에 다녀온 듯한 느낌이었다”는 설명이다.

그가 『나쁜 나라들』이라는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린 것은 2002년. 그 해 1월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북한과 이란을 ‘악의 축’ 으로 규정하는 것을 보며 여행가로서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래서 그만의 ‘나쁜 나라’ 리스트를 만들어 9개국을 다녔다. “이상하고 황당한, 세상의 끝에 있는 나라들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직접 가서 실체를 파악하고 싶었어요.”

그는 이 가운데 북한을 가장 독특한 나라로 꼽았다. 평양은 물론 백두산 등 북한의 곳곳을 여행한 그는 북한을 한 마디로 “초현실적인 나라”라고 정의했다. “가는 곳마다 영화 세트장 같았어요. 도로가 텅 비어 있는데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김일성·김정일 부자 찬양 일색의 선전문구와 포스터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는 북한 주민들의 김일성 부자 우상화에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김일성 초상화가 그려진 우표를 힘들여 구해서 미국으로 부치는 엽서에 붙였어요. 그런데 우체국에서 우표 속 김일성의 얼굴에 소인이 찍히는 것을 막으려고 엽서를 봉투 안에 넣고 그 위에 소인을 찍더군요. 북한 주민들이 착용한 김일성·김정일 배지가 가장 탐이 났지만 외국인은 전혀 구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인지 여행기 곳곳에 북한 체제와 김 부자 우상화에 대한 비판이 녹아있다. 휠러가 이들 9개국에 다녀온 뒤 만든 나름의 ‘악의 계수’에선 북한이 1위로 꼽혔다. ‘자국민을 어떻게 다루는가’ ‘테러리즘에 관련돼 있는가’ ‘다른 나라에 위협이 되는가’를 기준으로 선정했다.

그러면서 북한에 대한 관심은 외려 더 커졌다. “지금도 신문이나 잡지에서 북한 관련 기사가 있으면 놓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읽습니다. 집 서재엔 북한 관련 책을 꽂아두는 공간까지 따로 마련했어요.”

그는 앞으로 ‘통일된 한국으로 여행하는 날이 왔으면 한다’는 희망을 밝혔다. “20년 전 베를린장벽이 붕괴됐을 때 현장에 있지 못했던 게 가장 아쉬워요. 남북한이 통일된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바로 한국행 비행기를 타러 갈 겁니다. 그날이 어서 오기를 바랍니다.”

전수진 기자

◆토니 휠러=영국 태생으로 1973년 부인 모린과 함께 런던에서 출발해 6개월간 아시아와 호주를 배낭여행 했다. 주변 사람들이 여행 경험을 알려주기 위해 여행 가이드를 펴낸 것이 『론리 플래닛』시리즈의 시초가 됐다. 지금까지 500종이 넘는 『론리 플래닛』시리즈가 세계 각국에 출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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