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행복한 유권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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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미국인들은 올해 대통령선거에서 민주주의의 맛을 만끽하고 있다. 양대 정당의 선두주자 넷이 모두 괜찮아 보이는 것이다.

고어 부통령이나 부시 주지사가 막강한 배경과 조직을 업고 있다는 점에 약간의 반발심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람됨 자체에 대해서는 별 반감이 없다.

쟁쟁한 가문 출신이면서도 성실한 이미지의 고어와 소탈한 분위기의 부시, 농구선수 출신 개혁주의자이면서도 박식하고 신사다운 브래들리, 전쟁영웅 출신 보수주의자이면서도 밝은 유머와 열정이 넘치는 매케인. 대부분의 미국인은 이 넷 중에 적어도 둘은 좋아한다. 그래서 누구를 지지해야 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다.

지난 주 뉴햄프셔 예선에서 매케인이 엄청난 기세로 치고나왔다. 당 지도부의 지지와 선거자금 모금에서 절대적 우세를 보이던 부시를 압도적 표차로 누른 것이다.

뉴햄프셔는 조직력보다 인물에 따라 평가를 내리는 전통이 있고 비(非)당원들도 투표에 참여하기 때문에 당내 기반이 약한 뜻밖의 인물이 부각되는 일이 많다. 그래서 이곳에서 빛을 보고도 그후의 장정(長征)에서 탈락하는 후보가 많았다.

그러나 이번 매케인의 기세는 심상치 않다. 워낙 인상적인 압승이라서 그를 현실적 대안으로 다시 보게 된 사람들이 많다. 다음 예선무대 사우스캐롤라이나는 그에게 극히 불리한 곳이었지만 뉴햄프셔 승리가 전해지자 하룻밤새 지지율이 20여포인트 뛰어 난데없는 백중전이 되고 있다.

매케인의 첫번째 매력은 정직성이다. 그는 기자들을 같은 버스에 태우고 다니며 자신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는데, 버스 이름이 '바른 말(Straight Talk) 익스프레스' 다.

클린턴의 악명높은 '꼬인 말(Weird Talk)' 과의 대비를 통해 정직한 정치를 약속하는 것이다. 몇달 전 펴낸 자서전도 자랑스러운 면보다 부끄러운 면을 더 충실히 밝혀 독자들의 인기와 공감을 모으고 있다.

이 인기를 단순한 인기가 아닌 확실한 정치적 지지로 붙잡아 매는 힘은 보수와 개혁을 접목시키는 통찰력에 있다.

수구(守舊)에 그치지 않는 진정한 보수를 위해서는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 역설(逆說)적 관계를 실현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기 때문에 개혁파와 보수파의 지지를 함께 끌어들이는 것이다.

약점이 별로 없는 상대끼리의 싸움이기 때문에 상대를 깎아내리기보다 더 좋은 메시지를 만드는 데 애쓰는 포지티브 캠페인의 양상이다. 더러 직격탄이 날아와도 "허허, 그 양반이 다급해진 모양이군요" 하고 웃어넘긴다.

시민단체들이 나서서 네거티브 캠페인이나마 그래도 모처럼 캠페인답게 만들어주는 것이 고마운 우리로선 부럽기만 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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