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하나가 되어가는 유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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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베를린의 독일민속박물관은 지난 6월 유럽문화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꿔 개관했다.

유럽통합의 시대변화에 문화계도 호응해 '유럽정신' 형성에 공헌하겠다는 취지다.

프랑스의 국립민예전통박물관도 같은 취지에서 비슷한 변신을 계획하고 있다.

2차대전 후 수십년간 유럽국가들의 단결은 정치적.군사적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냉전종식 후 단결의 목적은 경제 쪽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이제 '세계 속의 유럽' 정체성에 대한 의식이 깊어지면서 문화적 연대감 강화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브뤼셀의 유럽의회 맞은편에 2003년 개관 목표로 유럽박물관 건립이 추진 중이다.

'하나의 유럽' 을 추구하는 각국 문화계의 노력을 통합해 유럽연합의 정신적 본산(本山)을 만들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점만을 찾던 국가주의시대를 벗어나 '유럽시민' 의 공통된 뿌리를 확인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러나 막상 뿌리를 어디서 찾느냐에는 의견이 엇갈린다.

박물관 추진의 주축에선 샤를마뉴가 신성로마황제로 즉위한 800년에 초점을 둔다.

유럽의 대부분을 야만인의 영역으로 보던 그리스-로마시대보다 유럽 전역이 하나의 문명권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시점을 본격적 유럽역사의 출발점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는 바로 이의를 제기했다.

문명의 본질적 의미는 정신에 있는 것이므로 오늘의 유럽이 추구하는 것과 같은 민주적.인문적 가치를 씨뿌린 그리스문명이 바로 유럽문명의 뿌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유럽연합의 울타리가 확장될 전망을 놓고 보더라도 그리스의 주장이 그럴싸하다.

냉전시대 서방국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현재의 유럽연합은 분명히 신성로마제국의 옛 판도에 가깝다.

그러나 앞으로 동구권 국가들과 터키까지 참여하게 된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역사 속의 어떤 제국도 유럽연합의 구체적 모델이 될 수 없다.

그리스뿐 아니라 영국과 스칸디나비아국가들도 신성로마제국설을 바라보는 눈길이 곱지 않다.

연합 안에서 독일과 프랑스의 중심적 역할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나 하는 의심까지 하고 있다.

유럽문명의 뿌리를 어디서 찾느냐 하는 문제는 유럽연합의 성격을 규정할 열쇠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 '뿌리논쟁' 은 쉽게 낙착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최근까지 이어져 온 수백년간 항쟁의 역사를 뛰어넘은 위에 이 논쟁이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럽이 합쳐야 한다는 대명제 앞에 온갖 참혹한 전쟁의 기억들을 역사의 에피소드로 돌려 놓고 미래를 빚어낼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니, 최근의 역사에까지 발목을 잡힌 채로 있는 우리에겐 부러운 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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