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36) 뒤바뀐 입장

미국의 무기 제조회사인 휴즈 에어크래프트社는 우리가 레이저 탱크사격 통제 장치를 독자 개발한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은 모양이었다.

우리가 이미 개발을 끝낸 사실도 모르고 "레이저 탱크사격 통제장치 가격을 3분의 1로 깍아 줄테니 한 대당 30만 달러에 사라" 고 내게 전화를 걸어 제안해 왔다.

불과 3년4개월 전인 1975년 7월, 내가 휴즈 에어크래프트社를 처음 방문했을 때 제시한 조건에 비하면 파격적이었다.

그때는 레이저 탱크사격 통제 장치를 한국에 딱 두 대 들여와 그 성능을 보여주는 데만 무려 1백90만 달러를 요구했었다.

나는 당당하게 "우리가 10분의 1 가격으로 독자 개발했다" 고 대답했다.

상대방이 당황해 하는 것을 분명히 감지할 수 있었다.

너무 통쾌했다.

예전에 나를 괄시하던 거대 무기회사의 콧대를 이렇게 꺽을 수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또 기술개발에 성공하니 가격을 엄청나게 깍을 수 있다는 사실도 새삼 확인했다.

일주일후 휴즈 에어크래프트社에서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1978년 11월 말이었다.

이번에는 전과 달리 매우 정중했다.

"당신을 미국으로 초청하고 싶으니 꼭 응해 달라" 는 것이었다.

나는 이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레이저무기 제조과정을 한 번 보여주고 싶다" 는 것이었다.

거절할 까닭이 없없다.

미 육군에 레이저무기를 단독 납품하는 세계적 무기회사를 견학할 기회를 얻기란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흘후 나는 로스엔젤레스 남쪽 컬버 시티에 있는 휴즈 에어크래프트社를 방문했다.

회사의 기술담당 중역이 '통제구역' 이라고 붙은 레이저무기 제조공장으로 나를 안내했다.

거기서 각종 레이저무기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제조과정을 샅샅이 보여줬다.

매우 파격적인 예우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나의 환심을 사려는 게 틀림 없었다.

나는 무엇보다 휴즈 에어크래프트社가 만든 레이저 거리측정기를 직접 보고 싶었다.

국방과학연구소(ADD)레이저부 연구원들이 5년간 실패를 거듭한 끝에 어렵사리 개발한 무기였기에 꼭 한번 비교해 볼 작정이었다.

그러던 판에 바로 레이저 거리측정기의 핵심 부품인 레이저 발진부(發振部)를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만든 것과 어쩌면 그렇게 똑 같단 말인가.

우리 연구원들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앞으로도 동기 부여와 여건만 만들어 주면 어떤 무기라도 만들 수 있다는 자심감이 생겼다.

귀국한 지 불과 나흘만인 12월 하순 어느날. 탱크의 자동 조준장치를 개발한 한국과학원(KAIS)의 박송배(朴松培.76.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교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박정희 대통령이 과학기술처 연두순시를 할 때, 자동조준장치를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ADD로부터 연구 용역을 받아 개발한 것이므로 당연히 내게 사전 양해를 구해야 했다.

나는 이 사실을 즉시 심문택(沈汶澤.98년 작고)ADD 소장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沈소장은 "ADD가 이 사업을 주관했는데 왜 KAIS가 대통령께 보고하느냐" 며 완강히 반대했다.

나는 朴교수가 3년간 애쓴 점을 감안, 沈소장을 설득해 간신히 허락을 받아냈다.

그리고는 이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1979년 1월 중순 어느날 오후, 오원철(吳源哲.72)대통령 경제2수석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KAIS에 연구비를 준 적이 있느냐" 고 물었다.

나는 무심코 "있다" 고 대답했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짜증섞인 목소리로 "나한테 왜 보고하지 않았느냐" 고 다그쳤다.

나는 순간 '필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구나' 하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업무관계로 吳수석을 10년 가까이 상대하다 보니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그의 기분을 충분히 간파할 수 있었다.

나는 차분하게 "간단히 보고드린 적이 있다" 고 말했다.

그러자 吳수석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며 당장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글= 한필순 전 원자력연구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