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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탈출의 긴 겨울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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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위선의 껍질은 선이다. 그러나 그 과녁은 악을 숨기거나 노리는 것이기 쉽다. 그렇다면 위악은 선으로 가는 우회로인가? 길을 아무리 넓히고, 10부제는커녕 홀짝제를 해도 며칠 배기지 못하는 도시 교통 체증을 보면서 자주 나는 위악적이 된다. 자꾸 차를 만들고 자꾸 타고 나와라, 그래서 빼도박도 못할 지경이 되면 덜 만들거나 덜 타거나 무슨 수를 찾겠지….

*** 기업 불신과 집단 이기주의 탓

그러나 그렇게 느긋하지 못할 경우도 있다. 일례로 기업의 해외 탈출이 그러하다. 자꾸 떠나라, 그래서 국내가 텅텅 비면 이래서는 안 된다는 반성이 일겠지…. 이렇게 되면 위악이 아니라 도박이 된다. 중국으로 나간 우리 기업 10개 가운데 제대로 자리 잡는 것이 2개 정도라고 한다. 중국에 진출한 대만 기업의 성공률이 25%, 싱가포르가 18%, 일본이 15%, 한국이 8% 수준이라는 얘기도 어디서 들었다. 그 수치의 산출 근거를 따져봐야겠지만, "여름 밤에 모깃불을 보고 달려드는 하루살이 같다"는 어느 주재원의 탄식이 귓전을 때렸다.

그런데도 왜들 그렇게 나가는가? 먼저 저임금이다. 그러나 과장은 금물이니, 중국 임금이 국내의 7분의 1 수준이라고 해서 제품 가격도 7분의 1은 아니다. 제조 원가 중의 인건비 비율이 14% 정도라면 제품값은 12%가량 싸지는 셈이다. 그리고 '노사 평화'가 있다. 이것도 계속 믿을 것은 못 되니, 붉은 띠 두르고 공장 출입 막는 쟁의는 아직 없으나 대형 외자 기업에는 공산당과 공회(工會)의 발언이 잦아지고 있다. 통역을 통한 작업 지시가 우리말 소통보다 답답할 것도 분명하다. 요컨대 임금이나 노사 문제가 국내 공장을 뜯어 중국으로 옮기는 결정적 이유는 되지 못한다.

그러면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보다 참여정부 출범 후에 팽배한 기업 불신과 집단 이기주의다. 기업은 직장과 소득을 만들어내는 공로 대신 규제와 개혁과 청산 대상으로 도마에 오른다. 바야흐로 세계화 시대인데 떠나는 기업을 무슨 수로 잡겠느냐는 정부의 시큰둥한 자세와 '자유 방임' 풍조도 한몫을 거든다. 그리고 세상이 망해도 내 몫만은 챙기겠다는 죽기 살기-같이 죽기-투쟁이 기업을 밖으로 내몬다. 확실히 우리 사회에는 노동 귀족과 노예가 있으며, 귀족의 자제가 뒤따르지 않는 한 기업 탈출은 필지의 사실이다. 일자리 없는 노예는 반란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동북아 경제들에 대한 불안과 안심이 교차했다. 중국 정부의 과열 억제책에 긴장이 따랐으나, 진정 효과가 나타나면서 '경착륙' 위험은 일단 피한 것으로 골드먼 삭스와 S&P 등은 평가했다. '10년 불황' 탈출이 예상보다 더디다는 일본 경제도 최근 소비가 늘고 일손이 모자라는 형편이다. 그리고 정말 부러운 소식이 있다. 해외로 떠난 공장들이 국내로 돌아온다는 것이다(삼성경제연구소, '일본 기업의 생산 거점 U턴과 시사점', CEO 인포메이션, 466호). 소재와 부품과 설비와 기술의 국내 연계를 강화하고, 핵심 기술의 해외 유출을 방지하려는 계책이다. 내국 생산 기지 완비와 기술 보호 이익이 해외의 저임금과 무쟁의 혜택보다 앞선다는 자각 때문이리라. 돌아온 공장은 '돌아온 장고'보다 무서우리니! 동북아 경제 중에 우리한테는 이런 낭보와 반성이 없다.

*** 일본은 해외서 공장 돌아와

원천 기술을 가진 일본 기업은 해외 자회사가 늘수록 수출이 늘어난다. 그러나 국산 부품을 얼마든지 중국산으로 대체하는 한국 기업은 사정이 다르다. 현대자동차는 부품 업체를 중국으로 데리고 나간 아주 다행한 기업이다. 현대는 국내 모기업 부품 25%에 협력 업체들의 국내 부품 26%를 합쳐 모두 51%의 국산 자재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기록적인' 수준이란다. 조립 라인에서 묵묵히 일하는 중국 젊은이들을 대견하게 바라보다가, 미구에 저들이 우리한테 배운 기술로 우리에게 창을 돌려댈 중국 자동차 산업의 '무서운 어른들'이 된다는 사실에 가슴이 답답했다. 위의 보고서는 지금처럼 핵심 역량의 국내 축적을 경시한 채 해외 생산에 급급할 경우 '제조업의 긴 겨울'이 도래한다고 경고했다. 위선으로든 위악으로든 긴 겨울은 피해야 한다.

정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