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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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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부자 되세요'가 덕담을 넘어 강박이 된 시절이다. 로또에 목을 맨 사람들이 정말 목을 매고 말았다는 뉴스가 가을비처럼 처연하게 귓전을 적신다. 대학에서 '부자학 개론'을 가르치고 부자와 결혼하는 법을 토론하는 판이다. 돈 따라 도는 세상이 어지럽다.

10억원 만들기가 유행처럼 번지는 요즈음에도 '한달에 10만원이면 참 잘 쓴다'고 말하는 분이 '강아지똥'을 쓴 동화작가 권정생씨다.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 빌뱅이 언덕에 어른 서넛이 겨우 끼여 앉을 수 있을 만한 방 두칸짜리 오두막에 사는 그는 '서울사람들이 나보다 더 불쌍하다'고 말한다. 그가 꿰뚫어본 '서울사람 불쌍론'은 이렇다.

우선 돈 없다고 아파트에서 떨어지고 물로 뛰어드는 사람이 많다. 아비.어미가 자식들 데리고 죽는다. 얼마나 딱하고 가엾은가. 찢어지게 가난하던 옛날 부모는 머리채를 자르든, 허벅지 살을 베든, 어떻게든 함께 살 궁리를 했다. 애들은 못 먹어서 삐쩍 말랐어도 좌절하지 않았다.

더 측은한 건 서울에 훌륭한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잘난 이가 넘쳐나는 만큼 못난 이가 늘어난다. 뛰어난 분들이 위에서 난리를 떠니 절로 아랫도리가 생긴다. 그 양반들 떠든다고 나라 좋아진 적 한번도 없다. 돈까지 긁어가니 억울한 건 하층계급뿐이다. 훌륭한 사람을 버리자. 평범한 사람들이 살다 가고, 살다 가고 해야 태평성대다.

권정생씨만큼은 아니지만 돈 없이 사는 법에 이골이 난 소설가 이철용씨는 현장소설 '꼬방동네 사람들'에서 돈이 상전인 우리 시대를 악에 받쳐 고소한다. "만약에 사람 대신 돈을 고발할 수만 있다면 돈이란 돈을 죄다 유죄판결이나 사형선고를 내려서 세상의 돈을 모조리 형무소에다 가두어 놓고 대신 돈 때문에 갇힌 사람들을 모조리 풀어놓고 싶다." 행상.품팔이꾼.소매치기.건달이 엉겨 악다구니를 하는 판자촌에서 꽃 피는 사랑을 그리며 그는 썼다. "돈도 소매치기도 없어진 세상에서 돈 대신 이웃을 사랑하며 아끼고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인지."

한때 한국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던 한 마디'무전유죄(無錢有罪) 유전무죄(有錢無罪)'는 이제 법의 테두리를 넘었다. 영혼을 쥐락펴락 하는 현대의 신이 된 돈을 호령하는 이들을 보는 건 드물지만 그래서 더 상쾌하다.

정재숙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