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 비트는 경쾌한 웹아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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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 "인터넷의 정수는 텍스트"라고 말하는 ‘장영혜 중공업’은 관객을 향한 일방적 말하기를 즐긴다.

미술집단 이름이 엉뚱하게도 '장영혜 중공업'이다. 미술이 중공업 수준이면 무게가 묵직하고 배짱도 두둑할 것 같다. 한국 작가 장영혜씨와 미국 출신의 마크 보주, 두 사람으로 이뤄진 '장영혜 중공업'은 실제로 재벌이나 권력자와 맞먹을 막강한 미술의 힘을 믿고 자랑한다. 이들이 1999년 발표한 '삼성의 뜻은 쾌락을 맛보는 것이다'등 '삼성'연작은 대기업 삼성을 신나게 두들겨줘 관람객을 미소짓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들이 삼은 무기는 중장비가 아니다. 재료가 거의 안 든다고 말할 수 있는 웹아트다. 플래쉬 프로그램을 이용해 만든 움직이는 텍스트와 음악이 치고 빠지면서 이루는 경쾌함이 날렵한 권투선수를 보는 듯하다.

10월 31일까지 서울 태평로 로댕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장영혜 중공업이 소개하는 문을 부숴!'는 국제미술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이들의 실력을 확인할 수 있는 근작전이다. 달랑 3점 작품이 나왔지만 전시장을 휘어잡은 과감한 형식과 내용이 가슴을 쿵쾅 두드린다. 막에 뜨는 문장은 더 서정적으로 다듬어졌지만 널찍한 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텍스트의 위력은 한층 강해졌다. 웹아트의 오스카상인 '웨비 어워드'를 두 차례 수상한 '장영혜 중공업'의 참모습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

관람객이 처음 만나게 되는'장영혜 중공업이 소개하는 지옥의 문'은 로댕갤러리에 설치된 거대한 조각 '지옥의 문'과 맞대결을 펼쳐 전혀 꿀리지 않는 솜씨를 자랑한다. '지옥의 문'과 거의 같은 덩치, 닮은 꼴을 인터넷 냉장고로 만들어낸 위장술이 재미있다.

가사일에 매여 있는 가정주부가 인터넷을 통해 세상과 접촉하리라는 인터넷 냉장고가 오히려 여성을 세상과 차단시키고 가사노동이라는 지옥으로 안내하는 문이 된다는 '장영혜중공업'의 문제제기는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내가 잠든 사이 너희들은 문을 부숴뜨리고/내 방에 달려들어 자고 있는 나를/침대에서 끌어내어 내동댕이치고/속옷만 입은 나를 길 바깥으로 내몰고…."

몸을 들썩이게 만드는 강한 비트의 음악 위를 떠도는 고딕체 글자가 고독하고도 불안한 현대인의 내면을 비춘다. '문을 부숴!'는 남미 작가 보르헤스의 작품 '비밀의 기적'에 바탕을 뒀지만 '장영혜 중공업'이 설정한 공간 속에서 관객들에게 중량급 펀치를 날린다. 우리 삶이 저기 텍스트로 뜨고 우리 몸이 저 모니터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당신 일상의 문을 부숴'라고 외치는 '장영혜 중공업'의 목소리는 냉소적이면서도 뜨겁다. 장영혜씨는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가 있는 사람이 역설적으로 극적인 기쁨을 느끼며 다시 한 번 살아보려고 하기에 이 작품은 낙관적이다"라고 말했다.

11일 오후 2시 전시장에서 작가와의 대화가 열린다. 02-2259-7781.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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