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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말리는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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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중세 유럽에선 음주가 권장사항이었다. 샘과 우물이 오염돼 물을 마신 뒤 병에 걸리거나 죽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귀찮게 물을 끓여 마시느니 차라리 술과 친하게 지내는 편을 택했다. 18세기 중반엔 차와 커피가 대안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카페인 과용의 부작용이 만만치 않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커피 금지령을 내리고 대신 술을 마실 것을 명했다고 한다(톰 히크먼, 『[술] 사용설명서』 ).

과음의 해악이 갈수록 심각해지며 이후 역사는 ‘술과의 전쟁’으로 점철돼 왔다. 20세기 초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아메리카 대륙까지 곳곳에서 실시된 금주령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말리면 더 마시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미국에선 술 마시러 교회에 가는 사람들 탓에 성찬식용 포도주가 1922년 214만 갤런에서 2년 뒤엔 300만 갤런 가까이로 늘었다. 의사들이 치료용으로 처방한 위스키가 한 해 180만 갤런에 이르기도 했다. 이런 ‘합법적’ 꼼수 외에도 밀수며 밀주 제조 등 온갖 불법이 판을 친 건 물론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85년 대대적으로 펼쳤던 금주 조치 역시 실패로 끝났다. 보드카 값을 올리고 생산·판매를 확 줄였지만 알코올 중독은 되레 더 늘었다. 술꾼들이 열악한 대용품을 엄청 마셔댔던 거다. 그 시절 성난 민심을 보여주는 우스개가 전한다. 보드카를 사려고 온종일 줄을 섰다 화가 난 남자가 고르바초프를 쏴 죽인다며 크렘린으로 향한다. 얼마 후 그가 되돌아와서 하는 말, “거기 줄은 여기보다 더 길어!”

금주 정책은 이렇듯 인기가 없는 데다 주세 수입을 줄여 나라 살림에도 치명타를 입힌다. 그럼에도 국민 건강을 나 몰라라 하기 힘든 각국 정부가 울며 겨자 먹기로 술에 선전포고를 하고 있다. 1인당 연간 알코올 소비량이 18L로 세계 선두인 러시아는 고르바초프 때와 비슷한 조치를 재추진 중이다. 술로 인한 사망자가 해마다 50만 명이나 나오는 걸 좌시할 수 없어서다. 프랑스에서도 급증하는 사고 때문에 노변 음주를 금지하는 도시가 확산되는 추세다.

우리나라는 신종 플루가 때아닌 절주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술을 삼가 면역력 키우기, 폭탄주 돌리지 않기 등 예방수칙 때문에 송년회 경기마저 썰렁하다는 소식이다. 나라님도 못 말리는 술꾼들을 과연 플루가 다스릴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신예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