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우의 행복한 책읽기] 필립 풀먼 '황금나침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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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판타지소설이 우리 독서시장을 빠른 속도로 점령해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그와 더불어 당연히 순수문학의 위축과 상업주의 문학의 득세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도 높아져가고 있다.

사이버 공간을 태생지로 하는 판타지문학의 유행은 시대가 요구하는 필연적 추세인 만큼 거리를 두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상대적 긍정론도 없지 않지만 이를 신종 무협지이자 문화 상품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는 비판의 소리가 아직은 문학계의 대세를 이루고 있는 듯하다.

판타지문학이 어차피 우리 문학 현실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면 이를 사갈시하고 원론적 차원에서 비판하기보다는 그것의 수준 향상을 모색하는데 진력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일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외국의 수준 높은 판타지 소설이 많이 번역돼나올 필요가 있다.

그래야 판타지 소설이 젊은이들이 즐기는 컴퓨터 게임의 연장선상에 있는 오락물의 일종이라는 혐의를 벗을 수 있을 것이다.

필립 풀먼의 '황금나침반' (이창식 옮김, 김영사)은 그런 의미에서 한번 유심히 들여다봐도 좋을 만한 소설이다.

톨킨의 '반지대왕' 처럼 판타지 문학의 고전으로 자리잡은 작품은 아직 아니지만 카네기 메달과 가디언 상 수상이라는 화려한 이력이 말해주듯 서구에서 최근 출간된 이 분야의 작품 가운데서도 수작으로 꼽히는 소설임에는 틀림없다.

대다수 판타지 소설이 그렇듯이 이 작품의 시공간은 실제 현실과 같지 않고 몇 개의 시대가 중첩된 잡종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현대적 분위기와 중세적 분위기가 공존하는 가운데 빅토리아 시대가 은밀히 얼굴을 내밀고 있다.

기독교 원죄 신화나 교권의 다툼에 대한 관심 못지않게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북구 신화도 일정한 역할을 맡고 있다.

또 모든 인간에겐 각기 동물 형상을 한 데몬이 있어 그와 운명을 같이 하는 것으로 설정돼 있으며, 곰이나 마녀 같은 비현실적이거나 초현실적인 존재들이 출몰해 이야기의 중심축을 담당하고 있기도 하다.

소설의 주인공인 리라는 어린 소녀로서 우연히 가난한 아이들을 납치해 북극으로 데려가 실험 도구로 사용하는 '고블러' 의 무리를 알게 되고 그들의 음모을 분쇄하기 위해 애쓰게 된다.

옥스퍼드의 대학 도시에서 시작한 이 작품은 런던을 거쳐 머나먼 북극의 가상 지역으로 이동한다.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그 소녀의 일거수 일투족은 계획된 것은 아니지만 인류의 운명을 뒤바꿀 수도 있는 중대한 사명에 연결돼 있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때마다 흥미진진한 모험과 음모와 추리가 이어진다.

유괴된 아이들을 찾아 떠나는 소녀의 여정은 전형적으로 자기 성숙을 위한 통과의례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녀는 여행 도중에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고 선과 악이 수시로 그 모습을 달리해 출몰하는 게임에 빠져들게 된다.

'황금나침반' 1권은 주인공이 자신의 부모가 지닌 사악한 측면을 발견하는 것과 함께 끝난다.

소녀에서 성인으로 가는 길목에서 수행해야 할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심리적인 '부모와의 결별' 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설정이 의미하는 바가 자명해질 것이다.

책을 덮고 나서 든 생각 하나. 그런데 정작 우리 독자층 가운데 이 소설을 읽는 사람은 판타지소설을 소비하는 층이 아니라 순수문학 독자가 아닐지.

남진우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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