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 딛고 일어선 어느 중소기업의 '희망송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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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땀과 인내로 어둡고 긴 터널을 벗어났습니다. "

30일 오후 경기도 화성군 정남면 가전제품 제조업체인 ㈜르비앙전자. 1천여평의 공장에서 올해 업무를 모두 마친 박덕성(朴德成.41)씨 등 54명의 종업원들은 "희망을 갖고 새해를 맞을 수 있어 너무 기쁘다" 고 입을 모았다.

거의 망한 회사를 1년8개월 만에 수출까지 하는 유망 중소기업으로 탈바꿈시킨데 대한 대견함과 새 즈믄해에 거는 기대로 이들의 마음은 한껏 부풀어 있다.

지난해 3월 31일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 속에서 80억원의 부도를 냈을 때 회사의 장래는 너무나 막막했다.

사장 등 경영진은 도주했다.

술렁거리던 직원들은 연구개발팀장이던 朴씨를 종업원 대표로 뽑았다.

몰려드는 채권단 및 거래업체와 대화 창구를 유지했다.

그러곤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는 심정으로 창고에 남아 있는 부품과 반제품들을 끌어다 무작정 공장을 돌렸다.

이미 3개월치 월급이 밀린 상태였다.

朴대표는 종업원들을 모아놓고 일일이 의견을 물었다.

1백20명 가운데 54명이 남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때부터 재기의 몸부림이 시작됐다.

끈질긴 설득 끝에 주채권자로부터 팔릴 때까지만 공장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직원들은 봉급도 잊은채 일만 했다.

주력상품인 선풍기가 계절상품인 탓에 납품은 비교적 쉽게 이뤄졌다.

그러나 부품업체는 야속하게도 현금결제를 고집했다.

"부도난 회사에 뭘 믿고 외상으로 부품을 대주느냐" 는 것이었다.

현금을 마련하느라 종업원들은 보험과 적금을 해약했다.

몇년째 모은 주택구입 자금을 몽땅 내놓거나 집을 담보로 은행대출을 받은 이가 수두록했다.

그렇게 모은 1억2천만원으로 '종업원 지주 회사' 가 출범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지난해 9월 '르비앙' 상표를 단 가습기.토스터기가 대형 할인매장에 첫 출시됐다.

생산직 사원까지 영업에 나섰다.

올초에는 신제품 '공기발생 가습기' 로 일본 수출길을 뚫었다.

그러나 경매에 부쳐진 공장을 찾을 길이 막막했다.

또 다시 종업원들이 힘을 모아 입찰보증금을 마련했다.

세차례 유찰을 거쳐 나온 싼 매물이라 관심이 높았다.

묘안을 짜냈다.

지난 1월 28일 수원지법 경매법정 앞마당. 종업원들은 '땀으로 이룩한 회사, 피로써 사수한다' 는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를 벌였다.

결국 4차 경매에서 단독 응찰로 공장을 낙찰받았다.

회사 이름도 ㈜제일가전에서 르비앙전자로 바꿨다.

불어로 '좋다' 는 뜻이다.

매출도 지난해 42억원에서 올해 76억원으로 늘었다.

중소기업청으로부터 수출지원 지정업체로 선정되면서 미국.네덜란드.사우디아라비아에도 수출하게 됐다.

경영진은 매월 10일 확대간부회의를 통해 전월 경영실적을 모두 공개하고 있다.

종업원들은 밀린 임금을 자본금으로 출자해 모두 주주가 됐다.

르비앙전자 주인인 종업원들은 "이 회사에 우리 젊음과 재산 모두를 걸었다" 며 "새해엔 신제품으로 틈새시장을 공략하고 세계시장에 진출하겠다" 는 포부를 밝혔다.

이무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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