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브리핑] 마임극단 리체데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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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어설픔을 가장한 치밀함이랄까, 혹은 치밀함을 숨긴 어설픔이랄까. 러시아 마임극단 리체데이를 수식하는 데는 바로 이런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한국에는 처음 소개되지만 리체데이는 러시아는 물론 세계 각국에서 '전설적' 이라는 수식어가 붙을만큼 대단한 명성을 지닌 극단이다.

그렇다고 이름값에 눌려 주눅들고 돌아가게 만드는 단체는 아니고 오히려 너무 빈틈이 많아 친근함을 느끼게 해준다.

불붙인 곤봉으로 저글링을 하거나 입으로 불을 뿜어내는 묘기는 서커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들은 관객들의 기대와는 달리 불이 무서워 곤봉 던지는 시늉만 내고 불을 뿜기는 커녕 오히려 꺼트리는 등 실수를 연발하는 식으로 웃음을 유발한다.

리체데이는 사실 마임이라기보다 '러시아 광대극' 이라는 독특한 장르의 하나다. 크게 보면 대사 없이 몸짓과 의성어로만 표현된다는 점에서 최근 전세계적으로 붐이 일고 있는 비언어극(넌버벌 퍼포먼스)에 속하지만, '스텀프' 나 '탭덕스' 같은 서구의 넌 버벌 퍼포먼스들이 소름끼칠만큼 철저한 계산으로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내는데 반해 리체데이는 어설퍼서 웃긴다는 차이가 있다.

뿌리는 전혀 달라도 찰리 채플린을 계승하고 있다는 평을 받는 것은 바로 이런 바보짓이 주는 비슷한 느낌 때문이다.

리체데이의 매력은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하얀 분칠을 한 얼굴에 과장스런 둥근 빨간 코를 매단 우스꽝스런 옷차림의 광대들은 별거 아닌 생활 속의 소재들도 기막힌 웃음으로 바꿔놓고 만다.

예를 들어 '모기와 광대' 는 귀찮은 모기를 잡는 단순한 모티브지만 광대가 자기 몸을 때리다가 객석에 뛰어들어가 관객들에게 몽둥이 세례를 하는 등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튄다.

발레리나가 튀튀(발레 스커트)를 하나씩 벗어던지면 커다란 엉덩이가 나오는 '백조의 꿈' 이나 연주보다 자세에 더 신경쓰는 일그러진 얼굴의 연주자가 등장하는 '바이올리니스트' 도 모두 알고 있는 것을 한번 더 비트는 데서 폭소를 자아낸다.

러시아적 유머는 물론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사회를 풍자하는 작품들도 재미있다. 물을 흠뻑 먹은 흰 광목천을 사정없이 바닥에 두들기며 온 객석을 물바다로 만드는 '빨래터 풍경' 이나 마이클 잭슨의 '드릴러' 를 패러디한 '드릴러 좀비' 등이 그것.

허름한 낡은 책상이 순식간에 재봉틀로, 피아노로, 다시 마이크로 바뀌면서 원맨쇼를 하는 '로버트와 꿈' 은 그야말로 보는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들의 진짜 매력은 관객에 따라 달라지는 애드립에 있다. 어린이 관객이 많으면 많은대로 또 성인이 많으면 많은대로 전혀 다른 색깔의 작품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26일까지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02-548-4480.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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