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로 인생 2모작, 3년 동안 착실히 준비했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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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에서 30년 가까이 근무, 50대 중반에 퇴직. 이런 이력이라면 대개 창업을 하거나, 중소기업에서 자리를 얻거나, 이도 저도 안 되면 그냥 소일하며 보내기 십상이다. 그러나 인생 이모작에 정답이 있는 건 아니다. 하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제3의 길’이 있다.   SK에너지와 SK가스를 거쳐 청주도시가스에서 전무로 퇴직한 이기성(56·오른쪽 사진)씨가 그렇다. 관심 분야를 깊이 있게 공부한 뒤 그 지식을 책으로 풀어내는 작가의 길을 택한 것이다.

2007년 그는 정년을 4년 앞두고 28년간의 직장생활을 접었다. 퇴직 후 바로 중국어학원으로 달려갔다. 오랜 꿈이던 역사 공부를 위한 준비였다. “대학 들어갈 때 역사학과에 가고 싶었는데, 밥벌이를 생각해 경영학과(연세대)로 진학했어요. 직장생활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드니, 역사 공부에 대한 욕심이 되살아나더군요.”

6개월을 꼬박 중국어에 매달려 기초를 닦은 뒤 가족과 함께 중국의 역사도시인 시안(西安)으로 건너갔다. 부인과 아들·딸도 새로운 경험을 반겼다. 1년간 어학연수를 하면서 깐수(甘肅)·칭하이(靑海)·신장(新疆) 등 중국 서북지역을 여행했다. 유적지를 둘러보고 현지인과 토론했던 체험을 엮어 최근 역사 기행 에세이 『장안 그리고 시안, 작은 사진』(에세이퍼블리싱)을 펴냈다.

“일본에선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도 관심 분야를 나름 공부해서 전문가 수준의 책을 펴내는 경우가 종종 있습디다. 그게 참 부러웠어요. 우리나라도 이젠 먹고살 정도가 됐으면 퇴직자들이 경험과 지식을 책으로 담아내, 지식을 나누면 좋지 않겠습니까.” 시간적 여유가 있고, 세상 보는 안목도 생긴 은퇴자들이 도전하기에 제격이라는 것이다.

그는 앞으로 3~4년에 한 번씩 역사 기행서를 낼 계획이다. 우선 다섯 권을 목표로 잡았다. 두 번째 책은 체코나 헝가리 같은 동유럽 국가에서 1년 정도 머물며 공부한 뒤 중소국의 시각에서 보는 유럽 역사를 다룰 계획이다.

그처럼 인생 2라운드를 작가로 살기 위해서는 퇴직 전부터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자금 마련이 우선 과제다. 그는 “직장에 다닐 때부터 알뜰하게 모아서 노후 자금을 마련하고, 퇴직 후에는 골프나 외식 같은 여유와 결별할 각오만 돼 있으면 마음이 풍요로운 노후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퇴직 3년 전부터 틈틈이 준비했다. 씀씀이를 줄이고, 중국어를 공부하고, 전문서적을 읽었다. 오랜 조사 끝에 물가가 싼 시안을 첫 목적지로 정했다. 가족 4명이 1년간 번듯하게 생활하고 공부하고 여행하는 데 3000만원이 채 안 들었다고 한다.

그는 퇴직 후 곧바로 뭔가를 해야 한다는 조바심을 버리라는 충고도 덧붙였다. 여생을 보내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일을 찾고, 그걸 이루기 위한 계획을 먼저 세우라는 것이다.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다 끊기면 마음이 급해지는 게 당연합니다. 퇴직 후 실패한 선배들 중엔 그런 부담감 때문에 서두르다 일을 그르친 사람들이 꽤 돼요.”

그는 인생의 주기를 세 단계로 나눠 설명했다. “평균적으로 태어나서 30년 간 교육받고, 사회에 나와 30년간 일합니다. 나머지 30년 새 삶을 살기 위해선, 적어도 2~3년은 배우고 준비하는 기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는 내년 역사학 석사과정에 입학하기 위해 곧 대학원에 입학 지원서를 낼 계획이다. 영어 시험에 대비해 지난여름은 꼬박 영어학원에서 보냈다.

글=박현영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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