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90.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제13장 희망캐기 25

어얼씨구 넘어간다/저얼씨구 넘어간다/무슨 타령에 넘어가나/물감타령으로 넘어간다/지금 때는 어느 때냐/연산홍록의 봄바람/시절좋다 만수춘/여러분네 어서 오소/물감 봉지들 사가소/수줍었다 진달래/점점 웃어 연분홍/금수산록에 살구꽃/집집뜨락에 홍도화/다롱다롱 다홍색/마음깊은 심홍색은/치마감에도 좋구요/사사록록에 풀색은/어디에나 알맞구요/청청하늘에 담청색/나들이 치마가 좋구요/얼씨구 잘한다/저얼씨구 잘한다/품바품바 잘한다/노변가에 개나리/금빛으로 물들어/황황색에 누르황/아름답다 담황색/진하다 진황색/적황이면 불노랑/불노랑 뒤에 연밤색/연밤색 뒤에 진밤색/가지가지 열렸네/청남변색에 가지색/소매감에 돌리고/진심어려 진분홍/댕기감으로 돌린다/저기 있는 아가씨/달님같이 생겼네/샛별같은 두 눈에/앵두같은 두 입술/누굴 닮아서 예쁘나/명모호치 미소는/꽃이 피는 자태라/유구무언의 인품은/외유내강 분면타/어서어서 고르소/마음놓고 고르소/심심산천에 도라지/꽃이 한참 필 때는/남색치마가 제철이오/시내강변에 실버들/파릇파릇 필 때면/연록색이 제격이라/감투망건 검은색/어디에다 드릴까/흰저고리 입자면/검은치마 제격이라/원앙금침 수놓아/정월송학 장수침/화중왕에 모란침/복복자에 만복침/매화점점 매화침/구월국화 국화침/각색물감 다 있소….

두 여자가 양동이에 담아온 것은 막걸리였다. 소금구이 새우 한마리씩이 곁들여 공짜로 제공되는 것이었으니, 쑥스럽다고 사양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포구에 정박한 어선들의 선등들도 모두 꺼진 뒤였으므로 달빛은 더욱 밝았다. 북장단에 맞춰 춤사위가 간드러진 아낙네들도 없지 않았다. 북소리 나고 장타령 구성지자, 구경꾼들은 물묻은 손바닥에 깨 엉키듯 꼬여들어 발길을 돌릴 줄 몰랐다. 이미 잠자리를 잡았던 외지인들까지 다시 옷을 꿰어 입고 난전마당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방극섭의 등골에 땀이 흐르고, 이마에 더운 김이 모락모락할 즈음에는 한씨네 난전 차일막 앞에 모여든 구경꾼들만 백여명을 헤아렸다. 그때까지도 한씨네는 쌓아둔 새우 상자를 헐지도 않았고, 팔아야 할 물건이란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공짜 막걸리로 얼큰해진 사람들이 상자를 가리키며 언제 팔기 시작하느냐고 성화를 부릴 때까지 한씨네 일행은 어떤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시달림을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렵다 싶었을 때, 비로소 새우 상자를 헐었다. 전도금까지 건네주고 매점한 대하 서른 상자는 값의 고하를 따질 것도 없이 삽시간에 팔려나가고 말았다. 공짜로 풀어먹인 막걸리 두동이 값과 한상자의 새우값은 그들 일행이 삽시간에 거머쥔 이문에 비하면 보잘 것없는 금액이었다. 새우를 맛있게 요리해 먹는 방법을 적은 전단을 돌린 것은 물론이었다. 그들이 처음 강원도의 장터에 난전꾼으로 나섰을 때 구사했던 방법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얼떨결에 혹은 운김에 충동구매를 해버린 것을 깨닫게 된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때는 이미 한씨네 난전 차일막도 잽싸게 걷어버린 뒤였다. 60년대까지 시골 장텃거리에 횡행하였던 만병통치약 장수들의 올가미 씌우는 판매수법은 상대방의 내심을 얼음속 같이 꿰뚫어 보는 안목이 출중한 사람들이 수다하다는 지금도 여축없이 통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씨네가 올가미 판매방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모리배들처럼 턱없는 이문을 챙긴 것은 결코 아니었다.이문 한가지를 겨냥하고 새삼스런 난전을 벌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한씨네에 간여했었던 행중들끼리 한자리를 만들어 신명풀이나 하자는 뜻이 전부였다. 차일막 앞에 모였던 구경꾼들이 흩어진 것은 밤 12시를 넘긴 시각이었다.한씨네 일행들은 빠짐없이 서문식당에 모였지만, 뒤풀이도 없이 제각기 맞춤한 방을 골라 잠자리에 들었다. 박봉환 내외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그런 일행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승희 한사람뿐이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