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원씨 생존 외국인 첫 국립미술관 초대전 열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지난달 26일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국립 러시안뮤지엄에서는 이 미술관 1백년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인 생존작가의 초대전이 열렸다.

국립 러시안뮤지엄은 11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37만여점에 달하는 방대한 소장품을 갖춰 에르미타쥬 박물관 등과 함께 러시아 유수의 미술관으로 손꼽히는 곳. 초대된 외국인 생존 작가는 바로 한국인 화가 이상원(64)씨다.

마르크 샤갈.바실리 칸딘스키.일리야 레핀 등 세계적 거장들의 작품들이 거쳐간 이 곳에서 이씨는 오는 21일까지 리얼리즘 계열 작품 80여점을 소개하고 있다.

리얼리즘 회화의 본산 러시아에서, 그것도 수차례 기획전을 통해 러시아 현대미술의 중요한 흐름을 짚어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 미술관에 실력 하나로 당당히 입성한 것이다.

국내에서 이상원이라는 이름은 아직 낯설다.

마흔이 넘은 나이로 제1회 중앙미술대전에서 특선을 해 데뷔한 그는 우리 화단에서 '아웃사이더' 다.

서울대나 홍대 출신도 아니고 잘 나가는 화랑의 전속 작가도 아니다.

서구 모더니즘에 치우쳐 리얼리즘의 계보조차 형성돼 있지 않은 한국 미술계는 지극히 사실적인 그의 작품을 탐탁치 않게 여겨왔다.

다만 60년대 극장 간판과 초상화를 그리던 상업화가에서 순수 미술로 돌아섰다는 특이한 이력 덕분에 종종 매스컴을 탔을 뿐이다.

잉그리드 버그만.클라크 게이블,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과 노산 이은상의 얼굴을 그리던 그는 순수화가로 변신한 후 섬세한 데생력을 기초로 '사라져가는 것' 에 대한 일종의 묵시록을 보여주고 있다.

조종(弔鐘)을 울리고 생의 뒤안길로 퇴장하는 것들, 이를테면 구겨지고 바랜 신문지, 구석에 처박힌 폐타이어, 닳고 닳아 거칠게 올을 드러낸 마대, 주름살 깊게 패인 얼굴을 한 동해안의 어부들…. 거기엔 존재를 떠올리게 하는 부재가 있으며 빛을 갈망하게 하는 그늘이 있다.

리얼리즘의 어법은 직설적인 까닭에 때로는 거칠게 화면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진실을 말하는 힘만은 폭발적임을 느끼게 한다.

러시아를 매료시킨 것은 바로 삶의 이면을 꿰뚫는 이러한 작가적 시선이다.

지난해 열린 이씨의 러시아 연해주 미술관 개인전에서 그를 처음 알게 돼 이번 초대전을 기획했다는 블라디미르 구세프 관장은 "그의 그림에는 동양적 전통과 현대적 기법이 한데 어우러진 독창성이 살아 숨쉰다" 고 찬사를 보냈다.

특히 그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장지에 먹과 유화물감을 혼합하는 기법은 관람객들의 시선을 붙들었다.

개막 리셉션에는 미지의 한국인 화가를 구경하기 위해 러시아의 미술계 인사를 포함, 6백여명이 몰려 들었고, 미술관으로부터 미리 전해받은 전시 도록을 보고 그의 작품에 반해버린 이인호 러시아 대사도 모스크바에서 축하차 날아왔다.

그의 인물화를 특히 감명깊게 봤다는 이대사는 "주름잡힌 노인의 얼굴에서 어려웠던 우리의 과거를 떠올렸다" 고 칭찬했다.

어린이 관람객들에게 사인을 해주느라 분주했던 이씨는 "화가로서 가장 기쁜 일은 내 그림을 사랑해주는 이들을 만나는 것" 이라며 감회를 밝혔다.

상트 페테르부르크〓기선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