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나의 송사] 9. 참미술을 그리며-미술평론가 윤범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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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하늘과 땅 차이. 20세기의 우리 미술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한 마디로 너무나 변했다.그렇다면 19세기말과 20세기말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19세기말의 사람들에겐 무엇보다 미술이란 용어가 생소했다.

그냥 '서화(書畵)' 였다. 그러니까 미술관이란 말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미술대학.화랑.미술기자.미술평론가 같은 용어도 부재했다. 무엇보다도 강조돼야 할 것은 유교적 예술 천시관에 의해 직업적 미술가를 별로 좋지 않게 보았다는 점이다.

이는 불과 한두 세대 전까지만 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몰락한 양반가문 출신임에도 나의 미술계 입문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당시 집안 어른들은 미술을 전공하면 가문의 망신인 것으로 생각했다. 하물며 초기의 미술가들이 겪어야 했던 고충은 얼마나 컸을까. 나는 1910년대 유화 도입의 선구자들이 한결같이 절필하고 좌절의 늪에서 헤맨 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사회적 냉대는 김관호 같은 일급화가조차 폐인이 되게끔 내몰았다. 우리들의 20세기 미술은 그렇게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핀 한 송이의 야생화였다.

그렇다면 오늘의 상황은 어떤가. 무엇보다 화려하다. 최소한 겉모습은 화려하다. 입시철만 되면 미술대학은 호황을 맞는다.

미대 지망생이 너무나 많다. 더불어 전국의 입시 미술학원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업종이 됐다. 게다가 아동 미술학원도 동네마다 번창하고 있다. 한두 세대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풍경이다. 어린 아이의 자질은 생각지 않고 미술학원으로 내모는 오늘의 부모들. 한 마디로 격세지감의 극치다.

미술계는 양적 팽창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해방될 때 5백명도 안되던 미술계 종사자가 지금은 5천명이 아니라 5만명도 더 될지 모르겠다.

한 명도 없던 미술평론가가 1백명 가량을 헤아리게 됐다. 하기야 매년 쏟아져 나오는 미대 졸업생만 해도 만 단위로 세어야 한다. 바야흐로 '미술 팽창시대' 다. 천지가 미술로 꽉 차 있다.

미술 전성시대라. 어디 이것이 그냥 생긴 것인가. 우리의 미술은 식민지 시대와 분단 시대를 거치면서 얼마나 많은 회한의 밤을 보내야 했는가.

때로는 항일 미술이니 친일 미술이니 하면서, 혹은 프롤레타리아 미술이니 부르주아 미술이니 하면서 갈등을 빚지 않았는가. 그뿐인가. 우리 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용어, 월남작가니 월북작가니 하는 특수용어도 있지 않은가.

나는 가끔 이쾌대를 생각한다. 그는 서울의 처자를 외면하고 포로 수용소에서 북을 택했다. 일제말 신미술가협회를 이끌며 탁월한 실력을 과시했던 화가였다. 그의 모임에서는 이중섭조차 뒷전에 있어야 했다. 북에서의 이쾌대는 주체사상이 자리를 잡으면서 도태되어 불행한 말로를 걸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에서 월북화가라고 금기 인물이었던 그가 북에서마저 금기인물이었다니…. 나는 평양을 여행하던 당시 이쾌대 이야기를 공식적으로 거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너무나 슬펐던 기억이 있다. 또한 북송선을 탄 후 행방불명됐던 조양규 역시 불행한 과거의 상징이다. 우리의 20세기 미술은 이렇듯 비극 속에서 자란 상처를 갖고 있다.

크려면 상처가 필요한 것인가. 상처 속에서 크는 나무들. 우리들은 상처투성이 속에서 참으로 어렵게 자랐다. 전쟁 후의 궁핍했던 사회를 생각한다. 참으로 썰렁한 풍경이다. 회색의 거리다. 화사한 색깔은 한 움큼도 허용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나무조차 앙상하게 서 있어야 했다. 잎파리 하나 허용하지 않던 시절, 박수근은 그런 시대상을 진솔하게 화면에 담았다. 전쟁 이후의 궁핍했던 사회상을 압축해서 조형화했다.

그의 생활 역시 남루했다. 누구 하나 화가라고 받드는 사람도 없었다. 가난은 그의 훈장이었다. 아들을 학교에 보내지도 못했다. 돈이 없어 병원도 제대로 가지 못했다. 끝내 눈 하나를 덜어내게 돼도 속수무책이었다. 화가가 실명을 해야 하다니….

박수근은 한국인을 상대로 그림 한 장 제대로 팔아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현재 국내에서 최고로 비싼 그림이 됐다. 우리들의 사회 초년병 시절, 그의 소품 정도는 첫 월급 가지고도 맞바꿀 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그림 한 점은 웬만한 집 한 채에 비할 만큼 비싸졌다. 궁핍한 시대를 증거한 박수근의 작품은 역설적일 만큼 지금 국내 최고가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폐허 속에서 핀 꽃이다.

근래 서울에 경매를 전문으로 하는 옥션하우스라는 곳이 개장했다. 서화가들의 휘호회 시절에 비하면 상상 밖의 일이다. 그만큼 우리 미술시장의 성장세를 짐작케 한다. 미술가도 급증했지만 애호가도 그 이상으로 확대됐다는 증거다.

이제 미술은 생활 속의 한 부분이 되어 나름대로의 역할을 수행해내고 있다. 이미지의 시대인 것이다. 또 디자인의 시대라고도 한다. 더불어 새로운 매체는 날로 각광을 받으며 신장세를 과시하고 있다. 활동 무대도 이제 국제화돼 파리.뉴욕이 결코 낯설지 않다. 우리들의 20세기는 참으로 숨가쁘게 달려왔다.

그런데 나의 가슴은 허하다. 아니 썰렁하다. 뭐 군중 속의 고독이니 하는 사치스런 말은 사양하겠다. 겉으로 화려한 수식어가 구사되면 될수록 속으로 상처는 계속 아물지 않고 있다. 미술품이 장식품으로 혹은 고가상품으로 남의 동네에서만 대우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겨레의 시대 정신은 외면하고 양적 팽창만 노래하는 미술은 아니었던가.

사실 나는 불안하다. 미술 인구는 날로 불어난다는데, 나는 참미술을 보기가 쉽지 않아 대낮에도 촛불을 켜야 할 지 모르겠다. 나의 20세기는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20세기를 그냥 보낼 수만은 없다. 나의 송사는 구겨져야 한다. 누가 자랑스럽게 송사를 쓸 것인가. 미술계의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모순을 외면하고. 가장 기본적인 사항조차 과제로 안고 있는 주제에 무슨 타령인가 말이다. 나는 20세기를 보낼 수 없다.

나는 그를 보내지 않으려 한다. 비록 이 자리가 진흙탕이라 하더라도 참미술의 시작을 보기 위해 당분간 이 자리에서 씨름을 더 해야할까 보다. 무슨 유마거사가 되겠다는 것은 아니다. 중생이 아파하니까 나도 아프다고 말할 주제도 아니다. 하지만 세월은 간다. 20세기 송사. 하늘에 연을 날리듯 시원스럽게 털어낼 수 없다. 나의 20세기는, 우리의 20세기는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범모 (경원대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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