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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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8) 석유로 예비군복 만들기

국방과학연구소(ADD)병참물자 개발실에서 개발한 것이 모두 빛을 본 것은 아니었다. 폴리프로필렌(pp)으로 만든 예비군 전투복이 대표적인 경우다. 72년 10월 어느날 아침 오원철(吳源哲.71)청와대 경제2수석이 전화를 걸었다. "韓박사, 상의할 게 있어. 청와대로 급히 좀 들어오게. " 평소 괄괄하던 그의 목소리가 이날따라 왠지 힘이 없어 보였다. 느낌이 이상했다. 청와대로 가면서도 계속 궁금했다.

吳수석은 전에 없이 반기는 표정을 지으며 "韓박사, 이걸로 예비군 전투복 좀 만들어 봐" 하며 내게 뭔가를 건네 줬다. 얼떨결에 그가 준 '물건' 을 찬찬히 들여다 보니 늘상 보던 솜(綿)이었다. 吳수석이 특유의 큰 목소리로 "그것 몰라? 그게 바로 폴리프로필렌이란 거야" 하는 것이었다. 吳수석은 그제서야 내게 고민을 털어놨다.

71년 중반부터 울산 공업단지에 석유화학 공장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듬해 6월에는 ㈜대한유화 폴리프로필렌 공장이 완공됐다. 폴리프로필렌은 일종의 섬유 재료인데 당시 대량 생산으로 값은 매우 쌌지만 판로(販路)가 문제였다. 그런데다 용도 또한 어망(魚網) 외에는 달리 쓰일 데가 없었다. 吳수석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폴리프로필렌은 쏟아져 나오는데 이걸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면 큰 낭패였다.

석유화학 공업은 당시 국력을 쏟아 부은 산업이었다. 어떻게든 이를 살리는 것이 吳수석의 최대 과제였다. 吳수석은 자문위원회를 구성,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었다. 학계 인사.섬유업체 사장 등 모두 6명이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어망의 재료로는 예비군 전투복을 절대 만들 수 없다" 고 주장했다. 깔깔해서 피부에 안 좋다는 것이었다. 吳수석은 낙심했다. 그러나 쉽게 포기할 그가 아니었다. 고민끝에 결국 해결사로 나를 선택한 것이었다.

나는 이 작업을 병참물자 개발실 이대규(李大揆)연구원에게 맡겼다. 李씨는 국방과학연구소의 전신인 육군기술연구소.연구발전사령부 출신이었다. 이름만 바뀌었 한 연구소에서 20년간 근무한 셈이다. 그것도 섬유만 연구해온 섬유 권위자였다. 과묵.성실한데다 일단 연구에 몰입하면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었다. 거의 두 달간 밤샘 작업을 했다.

12월 중순이었다. 출근해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있는데 李씨가 밝은 표정으로 내 방에 들어왔다. 직감적으로 '해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李씨의 목소리는 약간 들떠 있었다.

"실장님! 면(綿)과 폴리프로필렌을 섞어 혼방(混紡)으로 하면 됩니다. 몸 쪽에 면이 닿도록 하고 바깥 쪽에 폴리프로필렌이 나오게 하면 촉감 문제가 해결됩니다. " 순간 내 무릎을 탁 쳤다.

듣고 보니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았다.

李씨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방직공장만 정해지면 기술지도는 제가 하겠습니다. " 그러나 의외로 일이 꼬였다. 섬유업체들이 모두 비협조적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예비군 전투복을 만들려면 먼저 방직공장에서 폴리프로필렌으로 천을 짜줘야 했다.

그런데 너나 할 것 없이 거절하고 나섰다. 吳수석에게 사정을 얘기했더니 '상공부 섬유과장을 만나 보라' 는 것이었다. 그의 말대로 섬유과장을 찾아갔더니 그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몇시간씩 밖에서 기다리게 했다. 잠깐 시간을 내 주긴 했지만 내 말에는 건성이었다. 곧바로 청와대에 들어가 吳수석에게 이를 그대로 전했다.

화가 난 吳수석이 전화로 섬유과장을 다그쳤다. 아니나 다를까. 약발이 통한 모양이었다. 다음날 오후 상공부로 들어 오라는 연락을 받고 갔더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국내의 '내노라' 하는 섬유업체 사장들이 전부 나와 있는 게 아닌가! 섬유과장의 위세를 처음으로 실감했다. 나같은 공군 중령을 하찮게 여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당시 섬유제품은 우리나라의 주력 수출품으로 수출용 원자재 구입 등 섬유업체의 '목 줄' 을 바로 섬유과장이 쥐고 있었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글= 한필순 전 원자력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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