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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 세계화, ‘음식 궁합’이 핵심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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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요즘 만나는 프랑스 국회의원이나 교수, 대기업 임원들은 으레 파리의 한국 음식점 ‘우정’ 얘기를 꺼낸다. 그만큼 우정은 프랑스 상류층도 인정하는 고급 레스토랑이다. 우정이 자리를 잡기까지는 10여 년간의 ‘와인 찾기’ 노력이 있었다. 이 음식점의 조성환 사장은 정기적으로 프랑스 친구들을 초대한다. 고급 레스토랑의 소믈리에나 셰프 또는 와이너리 주인들이다. 조 사장이 다양한 한국 음식을 내면 그들은 음식에 맞는 와인이 뭔지 서로 얘기를 나눈다. 명란젓과 수삼이 화이트 와인과 기막히게 어울린다는 사실을 찾아낸 건 한 와이너리 사장이었다. 갈비와 코트 뒤 론 와인의 찰떡궁합도 소믈리에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추천하면서 알게 됐다. 현재 우정은 5만원부터 100만원을 넘는 최고급품까지 200여 종의 와인을 갖추고 있다. 어지간한 프랑스 식당에서도 보기 힘든 와인 셀렉션이다. “음식과 와인의 구색을 맞추니 그제야 프랑스 손님들이 한국 음식에 눈을 뜨더라”는 게 조 사장의 말이다.

몽마르트르 언덕 근처에 있는 ‘소반’에 가면 우선 눈이 즐겁다. 하얀색의 두툼한 농어회 두 점 옆으로 초고추장을 붓글씨 쓰듯 묻혀 놓은 접시를 내밀면 프랑스 손님들은 사진 찍기 바쁘다. 소반의 또 하나의 매력은 시시때때로 바뀌는 메뉴에 있다. 음식이 맛있어도 똑같은 요리만 나오면 재미없어하는 프랑스 미식가들을 위한 배려다. 덕분에 목이 좋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음식점인데도 프랑스 언론에 수없이 소개됐다. ‘권스다이닝’은 파리에서 가장 멋스러운 한식당이다. 실내에 전통 고가구와 도자기를 잘 배치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냈다. 식기도 모두 한국에서 공수해온 놋그릇을 쓴다. 그래선지 이곳에서는 늘 나이 좀 있는 멋쟁이 프랑스 손님이 눈에 많이 띈다.

기자가 파리에 살던 15년 전만 해도 한국 식당은 손에 꼽았다. 그나마 소주 마시는 한국인 관광객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식당이 100여 개에 달하고 절반 이상이 프랑스 손님이다. 미식의 수도라고 자부하는 파리에 한국 음식 붐을 일으킬 수 있었던 건 우정과 소반과 권스다이닝 같은 음식점 주인들이 프랑스 손님의 취향을 철저하게 연구한 덕분이다. 한식에 맞는 와인과 다양한 메뉴 개발, 맛과 분위기 연출이 바로 그런 노력이다.

지난해 중앙일보가 한식 세계화 캠페인을 시작한 뒤 정부가 함께 뛰어들면서 활기찬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러나 유럽에서 열리는 정부 행사에 가보면 답답할 때가 많다. 군대 배식하듯 손님이 접시를 들고 한참을 줄 서 있게 하는 무례, 식성은 생각 않고 고기 또는 생선 한 종류만 내놓는 무성의, 음식과 전혀 맞지 않는 와인을 서빙하는 무지를 보면서다. 한식 세계화는 외국인에게 한국 음식을 던져놓는다고 저절로 되는 게 아니다. 세계 각국의 식습관과 문화를 고려하지 않으면 잃는 게 더 많을 수도 있다. 앞으로는 한식 행사에 앞서 현지에서 성공한 한국인 셰프들에게 먼저 조언을 구했으면 좋겠다. 파리가 좋은 모델이 아닐까 싶다.

전진배 파리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