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언론플레이] 맞든 틀리든 슬그머니 흘려 검찰도 곤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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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중국 베이징(北京)의 문일현(文日鉉)씨가 국민회의 이종찬 부총재에게 보낸 언론대책 문건에는 언론개혁의 '환경' 을 조성하기 위한 여러 방법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국민 여론을 정부쪽으로 끌어오기 위한 방법론인데 비리 기자들의 명단을 언론 등에 흘려 상처를 입히라는 것 등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언론대책 문건 파문이 터져나온 이후 이 문건에서 제시된 '기본철학' 과 유사한 상황들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어 국민적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고, 대상이 된 인물이나 조직은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당장 큰 피해를 보지만 정작 출처는 모호한 경우가 많다.

수사를 담당한 검찰은 "도대체 이런 밑도 끝도 없는 말의 진원지가 어디냐" 며 펄쩍 뛰지만 소문은 이미 번져나간 뒤다.

3일 오전엔 평화방송 이도준 기자가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에게 문건을 건네기에 앞서 이회창 총재에게 이를 알려줬다는 내용이 일부 언론에 보도됐다. 얼굴없는 사직당국 관계자가 출처로 인용됐다.

그러나 李총재가 강력히 항의하고 검찰도 이를 전면 부인해 결국 사과소동으로 이어졌다. 이보다 이틀 전인 1일엔 평화방송 李기자가 건설업체로부터 2천만원을 받았다는 내용을 검찰 고위관계자가 확인한 것으로 보도됐다.

발끈한 검찰은 "그런 진술은 전혀 없었고 보도된 신문을 들이대며 확인하니 李기자가 시인했다. 정치권에서 나온 얘기를 검찰이 밝혔다는 식으로 보도하지 말라" 고 항의했다.

그뿐 아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평화방송 李기자가 한나라당 鄭의원으로부터 1천만원을 받았다는 내용도 국민회의가 먼저 밝혔다.

또 국민회의 이영일 대변인은 文씨가 작성한 문건을 "중앙일보 간부가 한나라당 鄭의원에게 전달한 것으로 본다" 고 강변하다 나중에 공개 사과했다.

이종찬 부총재는 국민회의 의원총회에서 "文씨가 문건작성 때 중앙일보 간부와 상의했다는 녹취록이 있다" 고 언급한 뒤 말썽이 되자 이를 부인했다.

가장 큰 문제는 진위와 상관없이 일단 소문이 나면 "그래도 뭔가 있었겠지" 라는 식의 인식이 형성된다는 데 있다. 그것이 유언비어의 파괴력이다.

김종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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