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또 구호에 그친 예방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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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마음 속 분은 이해하지만 끝내 이민을 가야겠습니까?" "국민의 아픔이 안중에도 없는 나라에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

지난 8월 23일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와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 화재로 아들(7)을 잃은 김순덕(金順德.32.전 여자하키 국가대표)씨가 면담석상에서 나눈 대화 내용이다.

곤혹스런 표정으로 金총리가 金씨를 여러가지 말로 설득했지만 훈장까지 반납한 金씨는 끝내 마음을 열지 않았다.

"어린 생명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데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 "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합동영결식에서 이렇게 약속했다.

그리고 씨랜드 참사 이후 꼭 4개월째 되는 날인 10월 30일, 또다시 어른들 잘못으로 죄없는 청소년들이 불길 속에 서로 부둥켜 안고 세상을 떠났다.

씨랜드 참사 당시 당국은 짜낼 수 있는 모든 화재 예방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역시 냄비처럼 들끓다 시들해지는 '말 잔치' 에 불과했다. 그렇게 많은 어린 영혼을 떠나보내고도 화성군청의 말단 공무원 이외에는 책임지는 사람도 없었다.

화재뿐 아니라 다른 대형 참사가 발생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예방책은 당국의 위기 모면용 비상구였을 뿐 청소년에게는 꽉 막힌 출입구에 불과했던 셈이다.

"이런 상태에서 4개월을 버틴 것도 신기하다" 는 국민의 반응에 '맷집' 좋은 당국이 뭐라고 대답할지 궁금하다.

여름을 앞두고 터진 씨랜드 참사, 겨울을 목전에 두고 발생한 인현상가 화재사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스러져가는 우리의 죄없는 자녀들을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이번에도 정부는 비상대책과 또다른 화재 예방책을 만드느라 부산하기만 하다. 이번 만큼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시적 예방책이 나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울러 '책임질 사람 없는 정부' 라는 오명(汚名)도 이번 기회에 벗기 바란다.

김기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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