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기술자 이근안 자수] 잡을 의지 있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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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29일 오전 이근안(李根安)씨의 은신처인 李씨의 서울 동대문구 용두2동 집을 현장조사하러 나선 동대문경찰서 직원 4명은 취재진의 도움으로 겨우 집을 찾을 수 있었다.

李씨가 잠적해 있던 10년10개월 동안 검찰과 경찰이 과연 李씨를 검거하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일까. 이날 경찰의 행동을 보면 "전혀 없었다" 고 단언할 수 있다.

외견상으로는 검찰과 경찰은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흔적이 보인다. 89년 1월 李씨를 지명수배한 서울지검은 93년에는 강력부에 전담반을 설치했다.

경찰은 李씨가 근무한 경기경찰청 등 6개 지방경찰청 14개 경찰서 직원 79명으로 구성된 수사전담반을 구성했다.

그리고 수사전담반이 한달에 한번씩 친.인척 등 李씨 연고자의 동향보고를 반드시 하도록 했다.

연인원 3백89만명의 경찰을 검문검색에 동원했다. 하지만 李씨가 제발로 수원지검 성남지청에 나타날 때까지 검.경은 李씨에 대한 단서를 단 한건도 잡지 못했다.

우선 수사 실무를 맡고 있던 경찰은 기본적인 수사원칙조차 지키지 않았다. 96년 이후 최근까지 李씨가 숨어있던 집을 관할하던 서울 동대문경찰서에서 경찰청으로 올라온 월보에는 줄곧 '특이 동향 없음' 으로 기록돼 있다.

경찰청은 "부인 신모씨 등을 만나 확인한 바 李씨의 동향이 파악되지 않는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고 해명했지만 올들어 보고된 월보에는 신씨가 운영하는 미용실 건물의 주인과 인근 오락실 주인 등 주변 상가 주민들을 상대로 한 주변 동향만 파악돼 있을 뿐이다.

신씨를 접촉한 사실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어이없게도 李씨의 집은 수사선상에서 제외돼 있었던 셈이다.

동대문경찰서 측은 "압수수색영장이 없는 상태에서 가택 수색을 함부로 할 수 없어 주변 탐문수사만 했다" 고 해명했다.

그러나 李씨의 집 위치조차 모르는 경찰이 압수수색영장을 핑계로 삼는 것은 궁색한 변명에 불과하며 李씨가 자택에서 생활하며 8백여m 떨어진 부인의 미용실을 드나들기도 했다고 진술한 것을 보면 탐문수사라는 것도 형식에 불과했다는 지적이다.

경찰청도 마찬가지다. 李씨에 대한 재정신청이 받아들여져 궐석재판을 진행하던 법원은 지난해 10월 '소재 탐지 명령' 을 경찰청에 시달했었다.

그러나 경찰청은 감청 등 기본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경찰청 관계자는 "법원의 명령은 단순히 협조를 요청하는 차원일 뿐 경찰에 법적인 구속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고 변명했다.

검.경의 '수사 아닌 수사' 가 계속되는 동안 국정원은 李씨 검거에 상당한 공을 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경찰 관계자는 "지난해 몇달 동안 국정원 요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쏘나타 승용차 3대에 나눠 타고 미용실 주변 골목 구석구석에 배치돼 잠복 근무하고 있었다" 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그러나 경찰과 국정원이 정보를 교환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김기찬.이무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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