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씨 자수 이모저모] 신분증 제시하며 자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고문 기술자 李근안씨가 전격적으로 자수한 28일 밤 검.경과 고문 피해자들, 李씨의 가족 등은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 순간을 보냈다.

李씨는 성남지청에 스스로 찾아와 "제가 이근안입니다. 자수하러 왔습니다" 며 주민등록증을 제시했다.

서울지검은 28일 밤 이근안 전 경감의 신병을 인수받자마자 李씨의 해외체류 여부 등 도피행적에 대한 철야조사를 벌였다.

이에 앞서 지검 상황실로부터 자수 보고를 받은 임양운(任梁云)서울지검 3차장은 서초동 청사로 돌아와 문효남(文孝男)강력부장과 함께 향후 수사방향 및 대책 마련에 분주했다.

李씨는 성남지청에 자수했지만 김근태씨 고문사건이 서울지검 김민재(金敏宰)강력부 부부장에 이미 배당이 돼있던 사건인 만큼 서울지검으로 바로 이첩됐다.

李씨 신병을 확보한 성남지청은 "자수한 곳에서 수사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는 입장을 전달해 왔지만 서울지검에서 이첩을 지시했다는 후문이다. 서울지검은 수사관 4명을 보내 이날 오후 11시30분쯤 李씨 신병을 인계받았다.

최근 李씨를 추적, 체포계획을 마련중이던 서울지검은 李씨가 자수했다는 보고를 접하고 놀라는 분위기였다.

이날 오전에도 서울지검에선 李씨 체포를 위한 구체적 방안 등을 마련해 차장검사에게 보고까지 마친 단계였다.

그러나 또다른 지검 관계자는 "본격적인 李씨 행적 추적을 시작하기 전에 李씨가 자수, 인력과 비용을 절감하게 됐다" 고 했다.

이근안이 자수한 수원지검 성남지청은 28일 밤 늦게까지 2층 지청장실과 3층 특수부 검사실 불이 환하게 켜진 가운데 긴장한 표정의 직원들이 바삐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성남지청측은 출입문을 봉쇄, 50여명의 취재진을 비롯한 외부인의 출입을 전면 통제했다.

'이기배(李棋培)지청장과 신태영(申泰暎)차장검사를 비롯한 간부들은 외부와의 전화 통화마저 거절했다.

지난 85년 간첩혐의로 몰려 경기도경 대공분실 이근안 경감팀에게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한 납북어부 金성학(48.강원도 속초시)씨는 "죄를 짓고는 못산다는 말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니다" 고 말했다.

金씨는 "고문 동료들이 법정구속된 상태에서 이제 더이상 숨어있을 수 없다는 것을 李씨도 스스로 깨달은 것 같다" 고 했다.

金씨는 또 "지난 14년간 이근안을 비롯한 경찰관을 대상으로 피눈물나는 진실규명 싸움을 벌인 것을 생각하면 아직 한이 풀리지 않는다" 며 "그 당시 3개월간 당했던 모진 고문은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린다" 고 회고했다.

이근안 전 경감의 부인 신모(60)씨는 28일 오전 남편의 자수를 미리 알고 있었던 듯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평상복 차림에 외출했다.

평소 같으면 오전 9시쯤 서울 용두2동 미용실에 나와 문을 여는 신씨의 모습을 이날은 볼 수 없었다고 인근 주민들은 전했다.

11년전 밤샘 근무를 밥먹 듯하며 한달에 한두번 집에 오던 남편이 갑자기 '수배자' 로 바뀌어 아예 눈앞에서 사라진 뒤 신씨와 세아들은 고통의 나날을 보내왔다고 주민들은 말했다.

이날 오후 9시30분쯤 李전경감이 자수했다는 언론보도가 나가자 셔터가 굳게 닫힌 미용실에서는 전화벨 소리가 몇차례 울렸다가 끊어졌을 뿐 정적만이 감돌았다.

정재헌.채병건. 최재희. 손민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