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제92화 오프 더 레코드 (4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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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47. 아스팍창설 뒷얘기

1964년 10월초 외무부 출입기자들과의 오찬 도중 '아.태각료이사회(ASPAC)' 창설 추진에 관한 정보가 노출된 사실을 알고 나는 몹시 긴장했다.

나는 "비밀리에 추진중이니 제발 '오프 더 레코드' 로 해 달라. 이 기구가 결국에는 한국이 주도하는 최초의 아.태지역 협력기구가 될 것" 이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그러자 김영일(金榮一.전 연합통신 사장)기자등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른 기자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도하 각 신문들은 '아스팍 창설' 기사를 일제히 1면 머리기사로 올려 놓았다. 평소 나를 '눈엣 가시' 로 여기던 일부 정치인들이 이 사건을 그냥 놔 둘 리 없었다.

대통령을 만날 때마다 이들은 '젊은 장관을 앉히니 저모양' '국제 현실을 무시한 채 분수도 모르고 쇼하다 나라 망신 시킬 것' 이라는둥 나를 겨냥했다.

朴대통령도 나를 불러 호통을 쳤지만 나는 대통령 심기가 가라앉을 때쯤 '아스팍 창설로 한국의 국제위상이 올라가면 무역.차換돛?등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되고 다른 국가와도 어깨를 나란히 하며 발전할 수 있다' 고 설득했다.

朴대통령은 경제발전을 최대의 과제로 여기고 있던만큼 경제 관련이라면 무엇이든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대통령의 내락을 얻어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했던가.

65년초 아시아 외교의 거물로 동남아 지역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코만 태국 외무장관이 한국을 방문했다.

나로선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나는 그무렵 '잘 나간다' 는 기생집(청운각)으로 그를 모신 다음 파격적인 접대로 그의 마음을 사로 잡으려 했다.

"형님은 이미 아시아 지역에서 평가받고 있는 최고 외교관이 됐으니 이번에는 동생을 도와 큰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라며 간절히 부탁했다. 한껏 흥이 오른 코만은 내 청을 흔쾌히 받아 줬다. 교두보는 확보한 셈이었다.

65년 6월 나는 이 문제를 협의하러 동남아 순방에 나섰는데 라만 말레이시아 수상은 베트남전에 대한 부담 때문에 '미국배제.일본참가' 라는 조건부 승낙을 해 줬다.

장제스(蔣介石)대만 총통은 아스팍이 중공(中共)의 위협에 대처하는 군사기구로 만들어 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이긴 했으나 출발이 순수할수록 좋다는 내 설명에 기꺼이 양해해 줬다.

그러나 일본은 각료회의에서 이미 '아스팍 불참' 을 결정해 놓고 있어 사실상 그 열쇠를 쥐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65년 10월 도쿄 시내 긴자(銀座)의 한 술집에서 시이나(椎名悅三郞)외상을 만나 통사정을 했다.

한.일 회담을 추진하느라 우정까지 흠뻑 들었던 시이나는 대뜸 '각의 결정을 번복하려면 사토(佐藤榮作)수상의 결단이 필요하다' 며 다음날 사토와의 술자리를 마련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운명의 다음날 밤 10시 시이나 외상이 사토수상과 함께 나타났다.

일본 수상이 외국 정치인과 술집에서 만나는 것 자체가 이례적이었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가자 나는 사토에게 "선배님, 부탁이 있는데 꼭 들어 주셔야겠습니다" 고 했더니 사토는 "대의(大義)를 위한 일이라면 못 들어줄 게 없지" 하며 대범하게 나오는 것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아스팍 출범을 도와 줘야겠다" 고 했더니 사토는 처음과는 달리 시원한 대답을 못 했다.

내가 '수상께서 방금 들어 주기로 약속하지 않았느냐' 며 떼를 쓰고 달려 들자 옆에 있던 시이나 외상이 '일단 약속했으면 정치 선배로서 지켜야지' 하며 거들어 주는 것이엇다. 그바람에 사토도 결국 이를 수락하고 말았다.

66년 2월 朴대통령은 아스팍 협상 마무리를 위해 동남아 국가를 순방했고 그해 6월14일 마침내 서울에서 아스팍 창설총회가 열렸다. 아스팍은 한국주도로 창설된 최초의 국제기구로 지금의 아.태경제협력체(APEC)의 모태가 됐다는 점에서 한국 외교사에 남을 쾌거였다.

이동원 <전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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