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4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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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45. 마르코스의 경쟁심

1966년 10월 '월남전 참전국 정상회의' 참석차 마닐라에 도착한 나는 마르코스 대통령을 보고는 잠시 내 눈을 의심했다. 새까만 얼굴, 카랑카랑한 목소리, 걸음걸이까지 그는 朴대통령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외모 뿐만 아니라 동갑(1917년생)에다 우수한 머리, 황소 고집, 키 큰 여자를 아내로 두고 있는 것까지 기막힐 정도로 닮은 꼴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마르코스는 朴대통령이 하는 일이면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흠집을 내려 했는데 월남전 참전국 회의개최에 얽힌 사연도 그랬었다.

나는 한국이 이미 월남전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4만5천여 병력을 보내고 있으니 어떤 식으로든 한국의 목소리가 미국의 정책결정에 반영돼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도 미국은 월남전 문제를 한국 보다는 주로 서방 선진국들과 논의하고 있었다. 특히 존슨 행정부는 국내외 여론이 악화되자 화전(和戰)의 기로에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쪽이 됐건 한국이 최종 결정과정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일단 우리는 '월남전 수행과 관련한 연합국의 단결과시' 라는 명목을 내세워 참전국 정상회의를 제안했고 미측도 쾌히 이를 승락했다.

그런데 얼마 뒤 브라운 대사가 찾아와 '장소를 마닐라로 옮기자' 고 통사정을 했다. 그는 "깡패같은 마르코스가 결사적으로 '서울회의' 를 반대하니 이번만은 봐 주자" 고 했다.

朴대통령에게 보고했더니 "나쁜 자식, 기껏 밥상 차려 놓으니 자기가 주인 노릇 할려고 그래!' 하며 화를 냈지만 결국엔 마닐라로 양보해 주고 말았다.

참전국 정상회담은 66년 10월 24일부터 이틀간 마닐라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는 朴대통령을 비롯, 존슨(미국).마르코스(필리핀) 대통령, 호주의 홀트.뉴질랜드의 홀리오크.태국의 타놈.월남의 티우 총리및 키 부총리 등이 참석했다.

마르코스는 의전(儀典)상에서도 우리측 대표단을 홀대하다 못해 무시할 정도였다. 당시 각국 정상들이 모두 마닐라 호텔에 묵었는데 朴대통령 방이 러스크 미국무장관 방보다 작아 유양수(柳陽洙)필리핀 대사의 얼굴이 사색(死色)이 되다시피 했다.

마르코스의 '장난' 이 분명했다. 그러나 朴대통령은 전후 사정을 짐작한 듯 '작은 방이 정이 붙는다' 며 柳대사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우리측은 정상회의후 발표될 공동 코뮤니케에 '월남전을 평화적으로 종식시키는데 참전국의 참여와 양해가 있어야 한다' 는 내용의 문구를 삽입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만약 미국에 다음 정권이 들어서서 일방적으로 전쟁을 종식시킨 후 '전쟁이 끝났으니 한국과의 모든 약속을 파기하겠다' 고 발뺌을 해 버릴 경우 이에 대한 우리측의 대비책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10월 24일 밤부터 나의 특명을 받은 강영규(姜永奎)외무부 아주(亞洲)국장은 번디 미 국무차관보와 이 구절을 놓고 협상을 계속했다.

미측은 말로는 '당연한 일 아니냐' 면서도 이를 코뮤니케에 명시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한 거부감을 표시하고 나섰다.

그런데 25일 새벽 3시 30분쯤 번디가 내 방으로 전화를 걸어 왔다. 번디는 다짜고짜 "나 좀 살려달라. 姜국장이 합의를 안 해 주면 놔 주지 않겠다고 하니 어쩌면 좋으냐" 며 통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평소 추진력이 대단했던 姜국장은 '이 구절을 코뮤니케에 넣어주지 않으면 우리 둘 다 오늘 밤 잠 자긴 틀렸다' 며 미측 협상팀을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진 모양이었다.

나는 번디에게 "그런 구절을 넣지 않으면 미국도 용병(傭兵)시비에 휘말테니 姜국장과 잘 협의하라" 고 설득했다.

그런 다음 姜국장에게 "내용은 그대로 넣되 표현만 좀 부드럽게 바꿔서 합의해 주라" 고 부탁했다. 결국 이 부분은 말 투를 조금 부드럽게 바꾼 상황에서 코뮤니케에 반영되는 성과를 얻게 되었다.

25일 아침 갑자기 러스크 국무장관이 내게 전화로 '존슨대통령이 朴대통령과 조찬을 하고 싶다' 는 연락을 해 왔다.

이동원 전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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