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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다듬이질, 베리 나이스 사운드였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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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호 10면

1‘다듬이질 소리’. 스티븐스 대사는 이 소리를 ‘베리 나이스 사운드’라고 했다. 239중학생, 예산중학교’. 동복을 입은 두 학생을 찍었다.3.‘예산중학교, 예산’. 예산중에서 근무하던 여교사들과 함께한 스티븐스 대사(사진 왼쪽). 4.‘충남 한 마을의 초가집’. 스티븐스 대사는 이제 초가집을 볼 수 없어 안타깝다고 한다. 5.‘청주 외곽, 충북, 어느 여름’. 개천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6 .39시골 길’. 지게를 진 채로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는 촌부의 미소가 선량하다.[스티븐스 대사 제공]

캐슬린 스티븐스(56·한국명 심은경) 주한 미국대사는 얼마 전 충남 예산을 방문했다. 예산과 부여는 미국 애리조나주 출신인 그가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곳이다. 1975년 미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한국을 찾은 그는 77년까지 예산과 부여에서 중학생 등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그때 그는 한국을 돕는 평화봉사단 활동을 하면서 외교의 중요성을 인식했다고 한다. 그래서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치러진 외교관 시험에 응시했고, 78년 임용됐다.

‘심은경’ 주한 미국 대사, 70년대의 흑백 사진첩

스티븐스 대사는 봉사단원 시절 한국의 풍경을 자주 카메라에 담았다. 할머니가 마루에 앉아 다듬이질을 하고, 아낙네가 냇가에서 손빨래를 하며, 농부가 지게를 진 모습 등은 그의 눈에 신기하게 비쳤다. 그는 그런 장면을 열심히 찍어두었다가 얼마 전 ‘심은경이 담은 한국 1975~77’이란 제목의 사진첩을 냈다.그가 예산을 찾은 건 70년대 한국 농촌의 삶을 잘 보여주는 그의 흑백 사진첩을 옛 친구와 제자 등에게 보여주고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을 함께 더듬고 싶어서였다. 중앙SUNDAY는 그의 사진첩을 단독 입수했다. 그리고 스티븐스 대사 단독 인터뷰를 통해 사진에 얽힌 추억과 그걸 바라보는 감회를 들었다.

“그 시절 학생들이 내 마음 밝게 해”
인터뷰는 13일 오후 미 대사관 대사실에서 이뤄졌다. 스티븐스 대사는 인터뷰에 앞서 예산중학교의 76년 졸업 앨범을 보여줬다. 그는 이곳에서 1년 이상 학생들을 가르치다 부여로 옮겼다. 그는 앨범의 여러 사진 중 중학교 정문 위에 아치형으로 걸려 있는 간판을 보라고 가리켰다. 거기엔 ‘간첩과는 대화 없다.

신고하여 뿌리 뽑자’라는 표어가 적혀 있었다. 반공(反共)을 국시(國是)로 삼았을 때였고, 각급 학교에서도 반공의식을 강화하는 교육을 했던 참이니 그런 표어가 걸릴 만했다. 스티븐스 대사는 “당시엔 유심히 관찰하지 않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흥미롭다”며 “이 사진도 70년대의 한국에 대해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엔 거의 모든 사람이 한국전쟁을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안보 문제에 대해 긴장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의 사진첩을 들춰보며 “사진이 참 좋다”고 하자 그는 “수준이 높다고 할 순 없으나 사진을 보면서 한국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실감하게 된다”고 답했다. 그는 자신이 찍은 것들 중 가장 맘에 드는 것으로 ‘할머니의 다듬이질(사진 1)’과 ‘두 중학생의 얼굴’(사진 2)을 골랐다. 그리고 이렇게 회고했다.

“그 할머니가 다듬이질하는 걸 봤으나 처음엔 뭘 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참 독특하다고 생각해 찬찬히 지켜보다 뭘 하느냐고 물었다. 토닥토닥 하는 그 다듬이질 소리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매우 듣기 좋은 소리(very nice sound)였다. 그러나 그건 가난한 한국의 가정에서 아낙네들이 하는 힘든 노동이기도 했다.”

스티븐스 대사는 “당시 한국에 와서 문화적으로 부닥친 문제 중 가장 크다고 생각했던 게 빨래하는 것이었다”며 “개울가에 가서 쭈그려 앉아 손으로 빨래하는 건 참으로 힘들지 않을까, 특히 겨울엔 너무 손이 시리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더니 “나는 엄두를 못 냈다. 빨래는 하숙집 아주머니가 대신 해 줬다”고 답했다.

그는 ‘사진 2’를 지목하며 “그 시절 학생들은 항상 나의 마음을 밝게 했다. 그들은 쾌활했고 늘 웃었다. 그걸 보는 나는 정말 행복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지만 사진이 보여주는 것처럼 각자의 개성을 유감없이 드러냈다”는 말도 했다. “지금 연락이 닿는 제자는 몇 명이냐”고 했더니 “12명 정도이며 대사로 부임한 다음 만난 이들은 9, 10명쯤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몇 달 전 서울 파이낸스센터에서 조찬 강연을 하고 나왔을 때 어떤 중년 남성이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을 내 제자라고 소개하더라. 외환은행에 다니고 있다고 했는데 제자가 나를 보고 싶다며 찾아주는 것만큼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느냐”라고 말했다. 그는 “세상이 많이 달라졌지만 크게 바뀐 것 중 하나가 소통방식”이라며 “그동안 많은 이들과 연락이 끊겼으나 지금은 인터넷과 e-메일 덕분에 단절된 인연이 복원되고 있으니 참 좋은 일”이라고 했다.

“태권도 배울 땐, 도장에서 유일한 여성”
스티븐스 대사는 “초가집(사진 4)을 찍는 걸 좋아했다”고 밝혔다. 이유를 물으니 “초가집은 (환경친화적인) 그린(green) 그 자체일 뿐 아니라 아름답지 않으냐”라고 답했다. “초가집엔 벌레가 생기고, 불에 쉽게 타는 문제가 있지만 겨울엔 단열이 잘 된다는 장점도 있다”고 했다. “지붕 색깔이 맨 처음엔 황금색이었다가 1년 뒤엔 약간 퇴색하고 2, 3년쯤 지나면 코끼리 몸 색깔인 회색으로 바뀌는 걸 보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그걸 이제 볼 수 없으니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새마을 운동은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으나 초가집이 양철지붕 집 등으로 대체되는 것을 보고 슬프다는 마음이 들었다”며 “나는 좀 감상적인 사람(sentimental person)”이라고 했다.

스티븐스 대사는 높은 곳에서 찍은 듯한 농촌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산을 잘 봐라. 산에 작은 나무들밖에 없는 건 식림(植林)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도 식목일에 교사, 학생들과 함께 나무를 심었다”라고 밝힌 그는 “한국은 공업화를 하면서도 식림으로 그린화를 추구한 나라로 이런 사례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렵다”고 했다. “그때 식림을 했기 때문에 30년 이상이 흐른 지금 한국의 산은 완전히 달라졌다. 얼마 전 비무장지대(DMZ)에 가서 북한을 바라봤더니 그쪽 산에는 나무가 없더라”는 느낌도 얘기했다.

그는 태권도 도장에서 기념 촬영한 사진도 보여줬다. 그러면서 “한국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태권도를 배웠다. 청주에서 두 달, 예산에서 여덟 달 정도 배웠 다. 예산의 도장에서 나는 태권도를 배우는 유일한 여성이었는데 한국 학생들은 나와 대련하는 걸 기피했다. 내가 잘해서 그런 게 아니고 내가 외국인 여성인 데다 키가 가장 컸기 때문에 모두 부담을 느꼈던 것 같다. 당시 육체적으론 매우 힘들었으나 태권도의 정신도 배울 수 있어서 기쁜 마음으로 도장에 갔다”고 회고했다.

스티븐스 대사에게 “한국의 발전상을 보면서 뭘 느끼느냐”고 물었다. 그는 “30년 전의 한국이 물질적으론 부자가 아닌 건 맞지만 나는 당시에도 한국 국민이 나라를 발전시킬 재능과 능력, 그리고 야망이 없는 국민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며 “그런 관점에서 나는 한국의 발전에 놀라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는 “한국이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함께 달성한 건 참으로 대단한 일”이라며 “내가 그걸 목격할 수 있었다는 건 행운이자 특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평화봉사단의 도움을 받은 나라들 가운데 이제 다른 나라에 많은 봉사단을 보내는 국가는 내가 알기론 한국이 유일하다”며 “한국의 젊은이들이 다른 나라에서 열정적으로 봉사하는 걸 보고 들으며 감동을 느낀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다른 나라를 자원봉사 정신으로 돕는 일에 한국과 미국이 협력하는 방안을 모색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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