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퇴직연금제가 유리한 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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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선진국에서는 개인의 노후생활자금 확보를 위해 공적연금.기업연금.개인연금을 지칭하는 3층 보장체계가 일반화돼 있다. 공적연금은 국가가 보장하는 연금으로 생존에 필요한 최저 생활수준을 보장받고, 기업연금으로부터는 표준적 생활수준을, 개인연금으로부터는 보다 나은 문화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자금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이는 국가가 보장하는 공적연금만으로는 노후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기엔 크게 미흡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기업에서 추가로 보장하는 기업연금과 개인이 스스로 준비하는 개인연금이 공적연금과 긴밀하게 연계돼 상호 보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경우 기업연금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 법정 퇴직금제도는 사회보장제도가 전무했던 1953년에 근로자들에게 후불임금.실업급여.노후소득 등의 기능을 하도록 도입된 제도로 그간 국민연금과 고용보험제도의 도입, 임시.계약직 등 고용 형태의 다양화, 연봉제 등 임금체계의 유연화 등에 따라 임의제도로 변경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돼 왔다. 특히 현행 퇴직금 제도는 근로자의 대다수가 노후 소득으로서 이 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정규직 장기근속자에게만 유리한 제도로 변질돼 사회적 정당성이 점점 약화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퇴직연금제도를 조속히 도입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사회 일각, 특히 노동계의 우려로 오랫동안 논의만 해오다가 이번에 도입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퇴직연금제도에 대한 우려로 지적되는 것 중 가장 큰 것은 퇴직연금의 수령액이 자금의 운용 결과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 근로자의 노후생활 재원이 불안정하다는 것이다. 새로 도입되는 기업연금제도 아래서는 노사합의로 확정급여형과 확정기여형 중에서 선택할 수 있게 돼 있다. 확정급여형인 경우에는 사용자가 퇴직연금의 운용 및 급여에 관해 모든 책임을 지고, 연금 급여는 일시금 수령 기준으로 현행 퇴직금과 같아야 하기 때문에 그럴 염려는 전혀 없다. 다만 확정기여형 퇴직연금에 대해서는 이론적으로 이런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나 현실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매우 작다. 제도 초기에는 안정적 채권 등에 대한 투자가 주종을 이루고 분산투자 원칙과 수탁의무 등이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확정기여형 퇴직연금에 해당하는 미국 401(k) 플랜 재원의 규모 변화는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켜 주고 있다. 1990년 말에 350억달러에 불과하던 401(k) 플랜 규모가 가입자 증가와 주식시장의 호황으로 2000년 말에는 8190억달러로 급성장했다. 이후 2년 동안 극심한 불황기를 겪었던 주식시장 여파로 그 규모는 2002년 말에 6970억달러로 감소했지만 2003년 말에는 다시 8980억달러로 성장해 주식시장 여파에 대한 우려를 말끔히 해소했다. 중요한 것은 주식시장의 영향으로 인해 401(k) 플랜 가입자들의 동요가 크게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주식시장의 침체기에 포트폴리오의 구성을 안전자산 쪽으로 변경하면서도 연금 기여액을 계속 늘려왔다. 또 다른 우려는 퇴직연금이 주식시장 부양 대책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확정급여형인 경우 퇴직연금 지급의 모든 책임이 사용자에게 있기 때문에 근로자들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없다. 확정기여형 퇴직연금의 경우에도 투자 운용권이 전적으로 근로자에게 있기 때문에 주식시장 부양대책으로 이용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미국에서 확정급여형 퇴직연금의 주식 투자(41%)가 확정기여형(34%)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보아도 이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퇴직연금제도에 대한 우려는 운영의 묘만 살리더라도 충분히 해소할 수 있겠지만 앞으로 기업이 도산하더라도 연금을 대신 지급할 수 있게 하는 지급불능보험이나 지급보증제도의 도입 등이 뒤따른다면 이러한 우려는 완전히 사라져버릴 것이다. 최근에 강제적 퇴직연금을 도입해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홍콩의 경우를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도 우리의 퇴직연금 제도 도입에 도움이 될 것이다.

강병호 한양대 교수.경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