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희로 수기 독점연재] 17. 어머니,미움을 넘어섰어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東海の小島の磯の白沙に/われ泣きぬれて/蟹とたはむる(동해의 작은 섬 해안가 백사장에서/나는 눈물 범벅이 된 채/게들과 장난을 친다)'

이 구절은 불행한 삶 속에서 자학(自虐)의 세월을 보내다 27세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일본의 천재 시인 이시가와 다쿠보쿠(石川啄木)가 지은 '나를 사랑하는 노래' 란 시의 일부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독방에서 31년 7개월, 아니 그 전의 세월까지 합치면 50여년을 외롭게 지낸 나는 고독의 극치를 표현한 이 시가 그렇게 가슴에 와닿았다.

내게 있어 감방의 차가운 바닥은 저 멀리 떨어진 외딴 섬의 백사장이었고, 그 곳에 배를 대고 엎드려 상상 속의 게들과 장난을 치다보면 어느새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고독 속에서 지내면서 저절로 시인이 됐고 사상가가 됐다. 물론 혼자만의 장난이긴 했어도. 사형을 각오하고 시즈오카(靜岡)형무소에 수감돼 있을 때는 도쿠가와(德川)막부 말기에 반역죄로 사형당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란 사람이 감옥에서 지은 시를 읊으며 어머니를 생각하다 맥없이 쓰러지기도 했다.

'母を背負いて /その余り輕さに泣きて /三步あゆめす(어머니를 등에 업고/너무나 가벼움에 눈물이 나와/세 걸음도 걷지 못했네)'

기나긴 감옥의 세월을 지탱해준 힘이 있다면 그 첫째는 어머니의 존재였다. 그 다음이 독서였으며, 한글 공부였다. 노동과 식사, 그리고 약간의 휴식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었던 나는 틈만 있으면 감방 한구석에 있는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책을 펼쳤다.

나의 학력은 초등학교 3학년 중퇴가 전부다. 그런 내가 아무리 독서한들 사색의 흔적을 남기기 만무하겠지만 내 인생을 놓고 볼 때 커다란 영향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성적 판단보다 감정에 좌우되기 쉬웠던 나의 성격은 독서라는 매개체를 통해 많이 순화된 것 같다.

내가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것을 진정으로 자각하게 된 것은 역사책을 통해서였으며, 차별과 멸시에 굴해서는 안된다는 자존심도 책을 통해 갖게 됐다. 나는 지식인이 아니기 때문에 책을 통한 사유의 과정을 정리해 말하기는 힘들다. 잡다한 책을 무분별하게 읽다가 조금씩 머리 속이 채워지게 된 '선무당' 에 불과하다.

일본이 패망할 때 억울해 눈물까지 흘렸던 어린 시절의 내가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던 것은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를 읽고 나서였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낳아준 조국이 있으며, 그 조국이 외세에 침략당했을 때는 목숨 바쳐 싸우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그 책을 통해 깨달았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등 서양의 문호들이 쓴 작품을 통해서도 느낀 점이 많았지만 이해력에 한계가 있던 나는 주로 일본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접했던 것 같다.

초등학생 수준의 책에서부터 수준 높은 책에 이르기까지 내가 감옥에서 읽은 책은 줄잡아 1천5백권 이상 될 것이다. 그러나 깨진 독에 물붓듯 기초가 없는 내겐 독서가 시간 떼우기 이상의 큰 의미가 없었던 시절이 대부분이다.

한자 섞인 일본어도 제대로 못읽던 내가 하이데거.헤겔.오웬.니체.아리스토텔레스.피타고라스를 읽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사소한 지식이 쌓이면서 인간의 판단력이 조금씩 깊어지는 것을 느끼게 됐다. 마르크스가 쓴 '자본론' 의 이론을 바탕으로 레닌이 가난한 민중을 구하기 위해 실천으로 옮기는 과정은 어려웠지만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많은 독서를 통해 인간의 이상과 현실은 그렇게 쉽게 접목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옛 소련의 붕괴와 북한의 현실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국에 돌아와서는 "읽는 것과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이토록 다르구나" 하는 것도 절실하게 느꼈다.

감옥에 있을 때 일본의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IMF사태' 소식을 접하면서 나의 조국이 또다시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위기를 극복하고, 밝고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동포들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마음 속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수형생활 동안의 독서에 얽힌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았는데 막상 입을 열려니 머리 속에서만 빙빙 돌 뿐이다.

절망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의 심정으로 지은 '밤 바람' 이란 시를 소개하며 끝낼까 한다.

발광(發狂)한 죄수가/걸레 통을 요란스레 두드리면서/ '공습경보!' 라며/소리를 지른다/ 그러다가 이번에는/제 아내의 이름을 불러댄다/ 언제나 그 목소리에는/슬픔의 꼬리가 흔들린다.

나는/죽음의 환영(幻影)에서/벗어나지 못하고…/

아, /이 숨막히도록/견디기 어려운 심사

밤 바람이/내일의 기도를 위해서/유리창을 두드리고/제 자신을/잊지못하는/이 안타까움/

간수의 발자국 소리가/마음의 공동(空洞)을/걸어온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