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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추상화가 '피터 핼리' 국내 첫 전시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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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지금까지의 추상은 추상작가 개인의 미학적.관념적 유희에 불과하다. 추상회화는 사회적 의미를 반드시 띠고 있어야 하며 동시대 삶을 반영해야 한다.

" 형광안료의 사용 등 키치(kitsch:싸구려 대중문화)적 요소까지 과감하게 도입하는 추상의 형식으로 기존의 추상을 비판하는 미국 작가 피터 핼리의 전시회가 8일부터 11월5일까지 카이스 갤러리에서 열린다.

전시장 전면을 채우는 대작 2점을 비롯한 회화 6점과 작가가 직접 벽에 그리는 벽지 설치작업 등 총 13점을 선보인다.

핼리(46)는 예일대와 뉴올리안즈 대학원에서 회화와 미술사를 전공한 작가 겸 미술평론가. 그는 80년대 초부터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글과 그림을 통해 당시 세계 미술계의 큰 흐름이던 모더니즘을 바탕으로 한 추상미술에 비판적 견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80년대 후반 들어 유럽 화랑들로부터 연이어 초대받으면서 활동 영역을 한층 넓혔으며, 지난 97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판화제작의 새로운 개념' 전을 열면서 입지를 굳혔다.

이화여대 윤난지 교수(미술사)는 그의 작품이 "추상미술이 작가의 상상에 의한 독창성의 결정체라는 모더니스트들의 주장에 반기를 들어 '미술은 모방' 이라는 명제를 그들의 작품을 빌어와 패러디한 것" 이라고 평했다. 프랭크 스텔라.버넷 뉴먼 등 대표적 추상계열 작가들의 형태를 차용해 모더니즘에 대한 조소와 풍자를 시도한 '허구의 대상을 통해 그 허구를 드러내는' 작업이라는 것. 몬드리안 이래로 '추상의 상징' 격으로 통용돼온 사각형을 주로 쓰는 것이 그의 추상에 의한 추상 비판을 대표한다.

색상도 원색의 상업간판에나 사용하는 데이글로(형광안료의 하나)나 롤러텍스(합성수지의 하나)를 재료로 해 아주 가볍고 얄팍한 싸구려의 느낌을 주도록 의도하고 있다. 이는 싸구려 모조품으로부터 '고급미술의 영역을 지키자' 고 부르짖었던 모더니스트들의 영역지키기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핼리가 주장하는 '사회적 의미' 는 감옥 창살.컴퓨터 회로.모텔 천장.벽 등을 모델로 한 기하학적 디자인에서 보다 뚜렷이 읽힌다. 미셸 푸코에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는 그의 기하학적 추상은 학교.공장.주택.병원 등 도시 구조물의 질서정연하고 일사불란한 형태가 억압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규격화' 란 얘기다. 또 기술과학을 근거로 공공연하게 유포되는 유토피아의 환상을 테크놀로지에서 파생된 듯한 이미지와 촌스럽고 조악한 느낌마저 주는 색상 조합으로 비판하고 있다. 전시 제목인 '유토피아의 도형' 은 이러한 유토피아의 허구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와, 동시에 작가의 작업이 자기만족의 테두리에서 나아가 사회적 맥락을 가질 때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지 않느냐는 이중적 의미로 느껴진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국내에 소개된지 10년이 넘은 지금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어쨌든 주목할 만한 작가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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