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 '人權파병'이라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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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좀 관대하게 말해서 동티모르 파병 논쟁은 고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역사' 의 저자 투키디데스와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고 국제연맹 창설을 주도한 미국 대통령 토머스 우드로 윌슨간의 이론투쟁 같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를 맹주로 하는 델로스동맹과 스파르타가 주도하는 펠로폰네소스동맹의 전쟁(BC 431~404)을 기술하면서 국가관계에 있어서 도의(道義)의 한계와 이해관계(국가이익)에 대한 사려깊은 계산의 중요성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는 펠로폰네소스동맹에 속한 코르큐라가 코린토스로부터 안보상 위협을 받고 아테네에 지원을 요청했을 때 아테네가 스파르타와 맺고 있던 조약을 준수하는 의무보다 패권장악이라는 국가이익을 우선적으로 고려해 코르큐라를 지원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국제적인 신의나 정의감보다 이해관계가 우선한다는 주장으로, 현실주의 사상의 기초를 닦은 투키디데스는 헨리 키신저.한스 모건소.조지 케넌 같은 현대의 대표적 현실주의 사상가들의 대선배가 된다.

반면에 윌슨 외교의 기조는 이상주의다. 그는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를 세계에 널리 전파해 항구적 평화와 안정.번영을 실현하는 것이 국가정치의 목표이고, 또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윌슨이 오늘의 미국 대통령이라면 벌써 동티모르에 인도적인 개입을 했을 것이다.

여론과 의회의 반대는 별개 문제다. 한국의 윌슨이고 싶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국제사회의 동티모르 개입을 선창하면서 인권과 유엔에 대한 보은(報恩)을 내세웠다.

그는 보병부대 파견에 관해 "아시아의 인권국가로 자타가 인정하는 우리가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고 말했다.

金대통령은 두가지 설명을 생략했다. 첫째, 한국은 자타가 인정하는 인권국가인가. 둘째, 그의 말대로 한국이 인권국가라면 국가이익을 계산하지 않고 인도적인 파병을 해도 되는가.

김병국(고려대)교수는 한국은 인권국가가 아니라고 단정한다. "누구든 수사대상에 오르기만 하면 검찰은 순식간에 전화통화를 시간대별로 정확히 추적해 내고 국세청과 은행감독원은 수많은 계좌를 샅샅이 뒤진다.

그러한 탁월한 과학적 수사능력의 이면에는 누구든 권력자에게 찍히면 사생활 구석구석까지 파헤쳐져 인격파탄자로 여론재판당할 위험성이 숨어 있다. " (한국일보 9월 28일자) 많은 한국인들, 아니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金교수의 말에 공감할 것이다.

한나라당이 리얼리즘 외교의 입장에서 걱정한 국가이익의 문제는 어떤가.

정부는 우리의 파병이 유엔의 결정과 인도네시아 정부의 요청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보병대대 파병으로 한국.인도네시아 관계가 악화될 여지가 전혀 없고, 현지의 2만여 교민들이 불이익을 당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지 한인회는 파병에 '절대반대' 한다. 위협이 닥치면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교민들의 생각이 그렇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결정은 국민의 정서와 다르다. 인도네시아인들이 영웅 같이 생각하는 민병대원 한 사람이라도 죽는 충돌사고가 나면 문제는 심각하다.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전 참전 후 처음으로 보병대대가 해외로 나간다.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다. 지원부대를 가지고는 동티모르의 치안유지에 기여할 수 없다.

지미 카터의 시끄러운 인권외교는 실패하고, 로널드 레이건의 조용한 인권외교는 성공했다는 평가다. 파병이라는 쉬운문제가 어렵게 풀린 것은 金대통령의 너무 요란한 인권외교 탓이다. 외교적인 제스처도 국력에 걸맞아야 한다.

미국은 75년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통치를 지지한 전과(前科)때문에, 일본은 평화유지 아닌 치안유지에는 참가할 수 없는 법 때문에, 중국은 65년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쿠데타 시도를 지원한 과거 때문에 파병문제의 전면에 나설 처지가 아니다.

한국의 역할을 위한 틈새는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다. 동티모르 다국적군이 동남아시아 평화유지를 위한 어떤 항구적인 조직으로 발전할 가능성에도 대비하는 것이 정부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의 하나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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