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對北낙관 아직은 이르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북.미간 미사일 회담의 타결에 이어 북한의 백남순 외무상은 지난 25일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조.미(朝.美)고위급 회담' 을 진행할 것이며 이 기간 중에는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북한의 약속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북.미관계는 이제 본격적인 대화와 협상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마침 같은 시기에 현대의 농구단이 평양을 방문, 남북한 농구경기가 개최되는 등 민간접촉도 활발해질 조짐이다.

우리정부도 북.미협상과 때를 맞춰 남북대화의 재개 가능성에 대해 기대를 걸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최근의 북.미 접근이나 남북 민간교류가 한반도 냉전종식의 전조인지, 아니면 북한의 일관된 전략에 따른 것인지 생각을 요한다.

북한은 핵문제로 미국과 협상하며 직접 협상의 통로가 열린 1990년대 초반이후 일관된 대미.대남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우선 한반도의 정치.군사적 문제는 미국과 협상하며 이러한 문제의 논의에 한국은 철저히 배제한다.

북한이 보는 정치.군사적 문제의 요체는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 이며 한.미동맹은 적대정책의 핵심이다.

그러나 절박한 경제문제는 지원만 하겠다면 누구와 대화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 결과 당연히 대북지원에 관심이 많은 한국이 주요 논의상대가 된다.

또 가능하면 민간접촉을 선호하지만 지원량이 많다면 굳이 당국간 회담도 피하지 않는다.

또 북한은 정치.군사문제와 경제문제를 철저히 분리해 접근하고 있다. 금강산 관광을 허용하고 농구경기를 개최하며 비료지원을 위한 당국간 회담에도 응한 것은 이를 통해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한 것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경제분야의 접촉이 정치분야로 이어지기를 바라지만 북한은 여기에 분명한 선을 긋고 있다.

동해 금강산관광과 서해 해상교전이 동시에 발생한 사실이 이를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북한의 궁극적 목표는 물론 한반도의 정치.군사적 문제의 해결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루 아침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북한도 알고 있다.

따라서 우선은 한국을 배제한 '조.미협상' 구도를 만들고, 이 협상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가기 위한 정지작업에 주력하고 있다.

반면 경제문제는 매일 매일 당면하는 시급한 문제다. 시급하기 때문에 언제든 또 어디서든 이 문제를 제기한다.

남북간 뿐 아니라 4자회담.금창리 협상.미사일회담 등 기회 있을 때면 경제보상을 요구한다.

그러나 시급성과 중요성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경제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시급하기 때문이지, 결코 최종목표인 한반도 정치.군사문제 해결을 포기했기 때문은 아니다.

이러한 북한의 전략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과거 우리 정부는 북.미관계와 대북지원을 남북관계와 연계시킴으로써 북한의 '통미봉남' (通美封南)전략을 견제하고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열고자 했다.

그러나 북한은 가중되는 경제난 속에서도 자신들의 전략을 끈질기게 고수했고, 그 결과 남북관계는 정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김대중(金大中)정부는 우리의 대응전략에 근본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북.미관계와 대북지원을 남북관계와 연계시켰던 고리를 풀어버린 것이다.

'포괄접근' 을 통해 북.미관계 정상화를 적극 요구하고 '정경분리' 정책을 통해 대북지원을 사실상 자유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정치.군사문제에 있어서는 '통미봉남' 전략을, 경제문제에 있어서는 개방의 바람을 차단한 채 경제적 과실만 취하려는 '방충망' 전략을 고수하는 북한에는 내심 반가운 소식일지도 모른다.

최근의 북.미접촉이나 금강산 관광을 비롯한 민간접촉 움직임은 북한의 대남.대미 전략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대북전략의 수정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움직임 자체가 아니라 움직임의 방향이다. 과연 최근의 움직임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인가, 북.미관계 개선이나 대북지원이 남북관계 개선으로 이어질 것인가.

한반도의 현상에 만족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현상을 타파해보겠다는 의욕이 오히려 현상을 더욱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냉철한 현실인식으로 변화의 바람이 서서히 일고 있는 한반도를 바라봐야 한다.

백진현 <서울대 교수.국제법>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