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양성우와 황지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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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그러나 유명 시인이라는 것만으로 정부 산하기관, 그것도 차관급에 준하는 예우를 받는 자리에 갔다는 게 의아했다. 더구나 양성우 위원장은 김대중 총재의 평민당 소속으로 13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러나 나의 의아함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어졌다. 찬찬히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는 1997년 대선 무렵 한나라당에 입당했었다. 이부영·박계동·김원웅 전 의원과 함께였다.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했고, 2007년 대선에서는 이명박 후보를 도왔다. 후보 캠프의 문화예술총괄직능본부에서 일했다.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과는 재야 시절 고락을 나눈 사이다. 역시 쩍 하면 입맛이다. 그런데도 내 머릿속에는 ‘시인 양성우’라는 이미지가 너무 또렷하게 각인돼 있어 잠시 인사의 속내를 짚지 못했던 것이다.

양 위원장을 두고 현 정부를 싫어하는 쪽에서 ‘변절’이라고 매도하는 소리가 있는 듯하나, 나는 정반대로 생각한다. 안 그래도 촌수만 높지 힘은 없는 자리인데, 정권과의 인연을 매개로 능력을 발휘해 우리 국민, 특히 청소년들이 좋은 책을 많이 읽게 해준다면 그 이상 기꺼운 일이 없다.

이번에는 다른 쪽에서 툭 하는 소리가 들린다. 한국종합예술학교(한예종) 총장을 지낸 황지우 시인 얘기다. 그도 왕년의 저항시인에 속한다. 그러나 나는 ‘저항’보다 ‘시인’에 더 방점을 찍고 싶다. 널리 읽히는 연시(戀詩) ‘너를 기다리는 동안’을 상기해보라. 재기와 유머가 번득이는 실험시(또는 에로시)로 한때 논란까지 빚었던 ‘숙자는 남편이 야속해’의 ‘어느 날 나는 친구 집엘 놀러 갔는데 친구는 없고 친구 누나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는 시구를 떠올려 보라. 그런 황 시인이 2006년 2월 한예종 총장에 임명됐을 때 나는 솔직히 총장 감투보다는 ‘시인’이 더 어울리는데…라고 생각했었다.

황 시인은 올 들어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한예종에 대해 감사를 벌이자 5월 ‘나로 인해 본교에 몰려 있는 수압(水壓)을 덜어줘야 한다는 생각에서’ 총장직을 사퇴했다. 그러나 아직도 교수로 복직하지 못하고 있다. 문화부는 황씨가 총장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퇴했기 때문에 교육공무원법 관련 규정에 따라 복직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과연 그것만일까. ‘호박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는 것쯤은 이미 다들 짐작하고 있는데. 현재 황 전 총장은 교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행정소송을 낸 상태다. 문화부 감사에서 그는 전시회 명목으로 학교발전기금 600만원을 쓰고도 전시회를 안 열었고, 주무 장관 허가 없이 해외여행을 해 공금을 ‘횡령’한 잘못이 드러났다고 한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자진 사퇴한 시인의 밥줄까지 끊을 일이었는지 의문이다. 한예종이 그동안 어설프고 방만하게 운영돼 온 것은 사실일 것이다. 앞으로 설립 목적에 맞게 운영돼야 한다는 데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좋은 시인을 학교에서 내쫓는 것은 그것과는 또 다른 문제를 유발한다. 일을 풀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법적으로도 얼마든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사실 나는 길게 볼 때 양성우 시인의 국회의원, 황지우 시인의 총장 경력은 그들의 시에 비하면 아주 보잘것없다고 본다. 작가 앙드레 말로에게 문화부 장관 자리가 그랬던 것처럼.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