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의원의 자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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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국제면 한 귀퉁이의 조그마한 기사가 눈길을 끈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가 7백55명에 이르는 상원의 귀족 세습의원을 퇴출시키기 위해 '논술시험' 을 치르기로 했다는 기사다.

'내가 상원에 남고 싶은 이유' 라는 제목에 대한 '답안' 은 '세습의원 퇴출법' 에 따라 잠정적으로 남게 될 92명을 선정하는 기준이 되리라 한다.

집권 노동당 의원보다 야당인 보수당 의원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등의 당파 논리도 개재돼 있다지만 영국 상원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세습의원 퇴출문제에 대한 영국의 고민은 짐작이 갈 만하다.

영국 의회의 시발은 13세기 초 시작된 노르만 왕조의 대자문회의였다.

초기에는 귀족계급으로서의 성직자와, 평민계급으로서의 기사 (騎士) 와 시민이 함께 참여했으나 귀족계급이 회의참석을 기피하거나 참석해도 의사표시를 하는 일이 거의 없어 상.하 양원으로 분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상원으로 분리된 다음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영국 상원은 세습 및 종신 귀족의원과 성직자의원 등을 합쳐 1천명이 훨씬 넘지만 의회출석률은 평균 2백명을 조금 넘는 정도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상원의원 '자질론' 이 제기됐고, 그것은 정치인 모두에 대한 자질론으로 발전했다.

총리를 지낸 처칠은 정치인 모두에게 '자질 시험' 을 치르게 해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치란 천직 (天職) 이며 성직 (聖職) 과도 같아서 한몸을 다바쳐 헌신해야 하는데 정치인들은 딴 생각을 하느라 정치에 전념치 못하고 있다. "

정치를 하려는 사람들이 그에 필요한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는 선발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주장을 처음 제기한 사람은 2천5백년 전의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었고, 요즘에도 그런 이론을 내놓는 정치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영국 상원의 귀족 세습의원들과는 달리 선거를 거친 의원들로서는 그런 주장에 코웃음을 칠 법도 하다.

"나는 이미 유권자들의 자질 시험에 합격했는데…. " 그렇다면 과연 선거는 만능인가.

'옷 로비' 와 '파업 유도' 등 두 건의 국회 청문회를 지켜본 국민의 심정은 착잡하다.

자질을 의심케 하는 장면을 연출한 의원이 한 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질 시험' 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런 의원들을 꼼꼼히 챙겨뒀다가 다음 선거 때 정치판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정치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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