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비극앞의 인간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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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4년 전의 삼풍백화점과 같은 장면이 지금 터키에서는 여러 도시의 수많은 건물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사망자가 2만명에 육박하고 있는데 앞으로 그만한 숫자는 더 확인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불시에 닥친 천재 (天災)에 대해 사람들은 슬픔과 고통을 느낄 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비극에서 인재 (人災) 의 측면이 드러남에 따라 피해자들은 극심한 분노에 휩싸이고 있다.

가장 심한 타격을 받은 도시의 하나인 얄로바의 경우 지은 지 10년이 안된 건물은 90%가 무너진 반면 오래된 건물은 25%만이 무너졌다고 그도시 소방서장이 증언한다.

이스탄불의 옛 도시는 별로 파괴되지 않은 반면 주변의 신개발지역과 신흥도시들은 처참한 피해를 보았다.

신축아파트가 무너진 곳에서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부실건축이 확인된다.

함량미달의 콘크리트, 규격미달의 철근, 설계 불이행…. 건축업자들은 성난 시민들을 피해 도망다니기에 바쁘다.

정부는 부실 시공업자들의 처벌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부실건축이 업자들만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터키의 정치가 얼마만큼이나마 '민주화' 하는 과정에서 빈민층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허가 건축의 양성화를 서두르고 건축규제를 완화한 것이 90년대 부실건축의 배경이었다.

군부의 굼뜬 움직임도 시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군부는 재난에 대응할 인력과 장비를 가진 최대의 기관일 뿐 아니라 터키의 정치를 좌우하는 실력자로 인식된다.

그런 군부가 지진발생 후 나흘이 지난 토요일에야 겨우 쓰레기 수거작업에 나섰다.

지난 홍수때 즉각 투입돼 주민과 혼연일체를 이룬 우리 장병들은 그에 비해 미덥기 짝이 없다.

군부의 대응이 늦은 이유는 명확지 않다.

군부 자체의 피해를 수습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는둥, 정부와 군부 사이의 조율이 원활하지 않았다는둥, 변명조의 비공식 해명이 간간이 나오지만 구호작업의 긴박성에 비춰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구호작업에 관련되는 정치적 책임을 의식한 '정치군인' 들의 행태가 국민들

에게 의심의 표적이 되고 있다.

그에 비해 역사적 앙숙인 그리스의 즉각적 도움은 양국간에 획기적인 신뢰관계를 가져오고 있다.

그리스 시민들은 지진 소식에 접하자 곧 대대적 헌혈과 모금운동을 벌였다.

"어려서부터 터키를 미워하도록 교육받았지만 엄청난 비극 앞에서는 인간애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고 그들은 말한다.

터키의 큰 고통이 이런 소득이라도 거둔다면 불행 중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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