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개혁신문고] 수능시험용 컴퓨터 사인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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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감독기관이 나눠주는 컴퓨터용 사인펜만 사용해야 하는 법적 근거는 무얼까. 컴퓨터 판독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

문구 (文具) 벤처기업을 운영하는 양해석 (梁海碩.37) 씨. 매년 대학수학능력 평가시험 때 사용하는 컴퓨터용 사인펜에 대해 의문이 많다.

모든 수험생들이 한 두자루 컴퓨터용 사인펜을 갖고 있는데 왜 굳이 시험 전용료에 펜 구입비까지 포함시켜 경제적 부담을 주는가.

또 1회용으로 제공하면 물자낭비는 아닌지 등. 사인펜에 대한 그의 호기심은 지난 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단 1분1초가 아쉬운 수험생들의 시간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방법이 없을까 고심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답안을 표기할 때 지금처럼 여러번 칠하는 것이 아니라 도장 찍듯 한번에 끝낼 수 있는 사인펜을 만들면 어떨까?" 그는 여러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답안 모양을 한 둥근 펜촉을 만들었다.

실험해 봤더니 결과도 좋았다.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기존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답안을 작성할 때 드는 시간은 문항당 대략 2.5초. 반면 자신이 고안한 사인펜으로는 1초면 끝낼 수 있었다.

답안 표기에만 6분 (2백30문항 기준)가까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梁씨는 지난 96년에 실용신안을 냈고, 이듬해인 97년에는 특허도 받았다.

이어 지난해 3월 ㈜고구려 문방이라는 벤처기업을 세웠다.

당시 기술력을 인정받아 산업자원부의 산업기술개발자금과 중소기업진흥공단의 벤처기업 창업자금도 지원받았다.

지난해 10월 이 회사 제품이 시중에 선보이자 날개돋친 듯 팔려 나갔다.

한달여 동안 40여만개를 팔아 1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98년 산업디자인 우수 신상품' 으로 선정됐고 '98 한국산업디자인상' 을 수상하는 등 상복도 따랐다.

아이디어 하나로 우뚝 선 벤처기업가의 탄생을 눈앞에 둔 듯 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99년도 수능시험을 열흘 정도 앞두고 매출이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또 "시험장에서는 못쓰게 한다는데 사용해도 되느냐" 는 수험생들의 문의전화가 쇄도했다.

반품사태도 벌어졌다.

이유를 알아보니 의외로 간단했다.

'대학수학능력평가시험 때는 반드시 시험 감독기관이 나눠주는 컴퓨터용 사인펜만을 사용해야 한다' 는 규정 때문이었다.

梁씨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梁씨는 위에서 말한 의문점을 담은 질의서를 지난해 11월 교육부장관에게 보냈다.

그러나 교육부는 종종 무소식이다가 해를 넘겨 올 1월 26일 답변을 촉구하는 서신을 받고서야 짤막한 답신을 보냈다.

'질의 내용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에게 이첩했다' 는 것. 그러나 지난 2월 6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 명의로 온 답신은 더욱 납득하기 어려웠다.

'컴퓨터용 수성사인펜을 개인별로 지참하면 불량제품 사용으로 채점처리에 막대한 지장이 초래될 수 있다' 는 것. 또 동종업계의 공정한 경쟁을 유도하기 위해 공개입찰을 통해 구매하고 있으니 입찰에 참여하라는 내용도 덧붙였다.

현재 컴퓨터용 사인펜 제조업체는 모나미.동아.파이롯트.문화 등 4개 선발업체와 고구려 문방 등 5개사밖에 없다.

결국 시.도 교육청의 입찰에서 낮은 가격을 써내 낙찰받은 사인펜은 좋은 제품이고 가격경쟁에 밀려 입찰에서 떨어진 제품은 불량제품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더욱이 잉크가 말라 제대로 나오지 않는 일부 불량제품을 제외하고는 사인펜이 잘못돼 컴퓨터 판독이 안된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 梁씨의 주장이다.

미국의 경우 고사장에서 사인펜을 나눠주기도 하지만 수험생이 직접 갖고 올 수도 있다고 한다.

梁씨의 하소연. "적어도 수험생이 선택할 수 있는 여건은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

기획취재팀 = 왕희수.박장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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