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80.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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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제10장 대박

"승희가 동의할지 모르겠네요. " "승희야 한선생 말이라면 화약 지고 불로 뛰어들라 해도 사양할 여자가 아니지. " "봉환이를 다시 만나게 되면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은데요?"

"곱장사로 대박이 터진다는데, 한때 지나간 바람 때문에 케케묵은 감정 싸움일까? 게다가 봉환이는 결혼까지 했다며? 승희가 한선생 이상으로 잇속에 밝은 장돌뱅이란 걸 몰라서 그래? 방씨 말 들어보니까, 승희가 한 달에 삼백만원짜리 월급쟁이 금어치는 톡톡히 한다데. 영산포 어물전 주인이 했단 말 못 들었어? 승희가 장타령까지 부르며 매상 올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도매상이 실제로 삼백만원 월급을 제의했다는구만. "

"방씨가 기특하게 여기고 부풀린 게지요. " "뻥튀긴 게 아니라니깐 그러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데. " "그럼, 안면도의 일은 그렇게 실행하겠습니다. 형님!"

"강다짐 둘 것 없어. 밑지든 남든 행수가 알아서 처리할 일이지. " 이튿날 새벽, 변씨는 벌교로 출발하는 일행의 용달차에 올랐다. 그곳에서 강진으로 떠나는 일행과 하직하고 벌교에서 차를 내렸다. 주문진으로 떠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곧장 버스터미널로 가지 않고 상설시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무싯날이었지만, 길가에는 어물 좌판을 편 아낙네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장옥이 늘어선 읍사무소 뒤쪽으로 돌아가자, 철물가게가 나타났다.

자신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주인은 낡은 의자를 가게 앞에 내놓고 앉은 채 아침나절부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려던 당초의 생각을 단념하고 돌아섰다.

그곳에서 몇 발짝 옮기지 않아 이발소가 보였다. 이발소로 들어갈 때 덥수룩했던 그의 구레나룻 수염은 배코를 친 듯 깨끗하게 제거되고 없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요사이 구레나룻 수염을 기르고 다니는 사람이 없습니다. 남의 눈에 잘 띄기 때문에 처신하기에도 곤란할 때가 많지요' .이발사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리며 그제서야 버스터미널 쪽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마산행 버스에 올랐다. 머리 속은 텅 비어 있었는데, 버스가 출발하면서 애꿎은 눈물이 볼을 적시고 흘렀다. 마산에 내려서도 곧장 동해안 쪽으로 떠나는 버스에 오르지 않았다.

버스터미널 근처에 있는 다방으로 들어가 냉수를 두 컵이나 연거푸 들이켰다. 일찌감치 찾아온 더위에도 지치지 않는 듯 창 밖의 행인들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변씨 자신만 시간이 남아돌아 감당을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꼭히 게으름을 피우며 여행을 하겠다는 작정도 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서둘러 간다는 일이 두려웠다. 안동에선가 그의 구레나룻 수염을 발견하고 소스라치던 차순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 다방을 나와서부턴 변씨의 동작이 날렵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꼬리에 불달린 짐승처럼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 날 밤으로 주문진까지 당도하지 못하면 낭패라도 당할 듯 그는 잽싸게 움직였다.

서둘렀던 덕분에 주문진에 당도한 것이 그 날 밤 11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터미널에서 버스를 내리면서 종일 생각도 않았던 소주 한잔이 마시고 싶어졌다. 소주를 팔고 있는 구멍가게라면 새벽 4시를 넘긴 시각이라도 찾아낼 수 있었다. 선착장을 비롯한 주문진 시내 그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곳은 없었다.

새벽 4시에도 소주 팔고 있는 가게를 찾아 낼 수 있는 토박이라는 상념이 잠시 그를 즐겁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어느 가게에서도 소주를 팔고 있었다. 그는 길가의 구멍가게에 들러 소주 한 병에 과자 한 봉지를 사들었다. 자신의 집으로 가지 않고 방파제 쪽으로 걸어갔다.

바람 부는 방파제에는 삼삼오오 짝을 이룬 여행자들이 둘러 앉아 술추렴들을 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안면 있는 축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구레나룻 수염을 밀어 버린 변씨를 대뜸 알아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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