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도 시인 첫 시집 '작은 침묵들을 위하여' 펴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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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인간도 머리만큼 눈이 커져서, 생각만큼 보는 것도 자라나게 된다면 어찌 아니 좋을까 그 곤충은 필시, 생각하기보다는 바라볼줄 아는 생물일 것이다" ( '곤충의 눈' 중) .

한사코 사람이 아니라 눈이 큰 생물, 자연이길 바라는 시인 유승도 (39) 씨가 첫 시집 '작은 침묵들을 위하여' (창작과비평사.5천원) 를 펴냈다.

95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당선통지를 받고 강원도 정선 구절리에서 찾아온 유시인은 검은 비닐 봉지로 둘둘 말은 술통을 내밀었다.

통지를 받고 앞산 다래를 따 소주를 부어놓았으니 몇달 익힌후 마시라며 찔레꽃 같이 하얗게 웃던 시인은 '촌놈' , 아니 자연 그대로였다.

"사람이 떠나간 빈 집 앞에서 애기똥풀을 다독이며 찔레가 함박 웃고 있었다" ( '찔레꽃 애기똥풀' 중) .충남서산 출신인 유씨는 머슴.어선선원.탄광 광원 생활을 거치며 어렵게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후 도시를 미련없이 버리고 구절리로 들어간 것. 세상의 끝, 막장의 희

망마저 버리고 떠난 폐광촌으로 들어가 곤충같은 큰 눈으로 시를 캐올려 시인이 된 것이다.

이리저리 머리 핑핑 돌리고 쥐어짜는 삶이 싫어 자연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기에 유씨의 시에는 생각은 없고 바라봄만이 있다.

이런 바라봄의 시학이 빛나는 그의 시편들에서 독자들은 의미를 캔다기보다 그냥 그윽히 느끼기만 하면된다.

시의 향취를, 우리네 삶의 뜻모를 설움과 환희의 깊이를. "봐라, 저 달 표면을 기어가는 가재가 보이잖니?/빛이 맑으니 구름도 슬슬 비켜가잖니/가볍게 가볍게 떠오르잖니/저기 어디 탐욕이 서려 있고, 피가 흐르고 있니?/그저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산천을 끌어안잖니" ( '산마을엔 보름달이 뜨잖니' 전문) 맑은 보름밤 달을 비켜가는 구름이 가재가 기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가볍게 하늘을 비껴가는 구름의 환희, 물밑을 박박 기는 가재의 서러운 우주공간을 보름달은 훤히 하나로 끌어안고 있다.

환희와 설움의 구분 없는 시인의 맑은 눈에 인간의 탐욕, 평가가 스밀 틈이 없다.

그게 본디 우리 속내의 깊이이고 자연 아니겠는가.

"숲은 적막 속으로 가라않는다 홀연히 세상을 가르는 새 소리도 운무의 심연을 휘돌다 이내 잦아들어 삶과 죽음을 가를 수 없다/어디서 흘러온 바람인가 운무를 휘휘 몰아 노니는 곳에 홍조 띤 얼굴들이 드러나며 신선바위 주위를 어른거리니, 선녀를 보지 못했다 말하지 못하겠다" ( '운무 깊은 골에 철쭉꽃' 전문)

제목처럼 구름 안개 젖히는 바람에 슬쩍슬쩍 드러난 숲과 철쭉꽃, 바위 그리고 새소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도 시에는 생사를 넘나드는 귀기 (鬼氣)가 가득 서려있는가 하면 선경 (仙境) 이 확 펼쳐져 있지않은가.

뜻 없이 바라봄의 시학이 붙든 조선시의 한 진수를 이 시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집에 실린 많은 시들에는 자연에 대한 인간적 해석이 엿보이고 있다.

인간사의 애틋한, 희미한 미련까지 놓는다면 유씨의 시는 분명 '선녀를 보았다' 고 말할수 있을텐데도 말이다.

그러나 귀신까지도 놀라게 하는 조선시의 절창을 위해 우린 아직 기다려야한다.

유씨의 연륜이나 시력 (詩歷)에 벌써 그 경지를 요구할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21세기를 넘어서도 결코 스러지지않을 우리 조선시의 혼불을 유씨의 이번 시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인이 돼 잠깐 서울에 머물렀던 시인은 교사 아내를 선녀처럼 얻어 이내 강원도 영월로 들어가 농사를 짓고 있다.

올 여름 이 시집 한권 들고 자연의 깊이로 그윽하게 들어가볼 일이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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