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 실용 노선 깃발 아래” … 우파, 유럽을 접수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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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실용 우파, 방황하는 좌파=총선에서 승리한 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꽃다발을 들고 환하게 웃는 사진의 배경에서 선명하게 ‘기민당’(CDU) ‘중도’(die mitte)라고 씌어 있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유럽 각국의 우파가 중도 노선을 표방하며 잇따라 선거에서 승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진이다.

메르켈이 이번 선거에서 내놓은 공약은 그의 중도 노선을 잘 보여준다. 좌파의 것인지 우파의 것인지 헷갈릴 정도다. 전통적인 우파식 소득세·법인세 공약을 내면서도 노동시장 유연화에는 반대하고 있다. 그는 여성과 저소득층 등 사회적 약자를 우대하겠다는 약속도 했고, 올 초에는 은행 국유화 계획도 발표했다. 이 때문에 메르켈은 1990년대 헬무트 콜과는 다른 아데나워식 사회적 시장경제의 계승자라는 말이 나온다. 경제 노선에서의 실용적 중도 표방은 이번 선거에서 메르켈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좌파 사민당을 늘 지지해온 금속노조의 변화가 대표적이다. 금속노조는 그동안 노조원들에게 사민당 후보를 찍을 것을 권고해 왔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는 기민당과 사민당의 정책 차이가 크지 않자 사민당을 공개적으로 밀지 않았다. 2007년 대선 패배 후 중심을 잃은 프랑스 사회당도 5월 유럽 의회선거에서 또 한번 쓰라린 패배를 맛봤다. 2007년 대선과 총선, 지방선거, 유럽의회 선거 등에서 연전 연패하고 있다. 특히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군소 정당인 녹색당과 같은 16석을 얻는 데 그쳤다. 현지 언론은 “프랑스 사회당에는 달라진 세상을 이해하고 새로운 좌파를 이끌 리더도 좌표도 없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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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프랑스 사회당은 여전히 해묵은 좌우 다툼에만 매달리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사회당의 텃밭을 빼앗아간 중도파의 프랑수아 바이루에게 최근까지도 “우파인지 좌파인지 답하라”고 종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 우파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공무원 수 감축과 기업 법인세 인하 등을 추진하면서도 ‘행복지수’가 담긴 국민총생산(GDP)을 제안한다든가, 탄소세 도입 등 좌파 경제학자들의 주장도 받아들이고 있다. “프랑스를 위한 것이라면 좌든 우든 관계없다”는 그의 실용 철학이 담긴 것이다. 집권 초기부터 일관되게 추진해온 ‘열린 내각’도 역시 같은 맥락이다.

◆우파의 실용적 복지정책 인기=2000년대 이후 덴마크와 스웨덴에선 중도 우파가 좌파를 눌렀고, 핀란드·그리스·네덜란드·이탈리아 등에서도 우파 정권이 들어섰다.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우파가 수성에 성공했다. 지난해 9월 오스트리아에서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좌파인 사민당이 전후 최악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들 중도 우파 정부는 과거 좌파의 복지 정책을 국민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실용화하고 있다. 수정 좌파 정책이 인기의 비결이다. 스웨덴의 중도 우파 정부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 복지를 ‘워크페어(일하는 복지)’로 전환하면서 실업자 재교육 등 꼭 필요한 곳에 쓰는 것 등이 대표적이다.

현재 영국·스페인·포르투갈을 빼면 대부분 중도파 또는 우파가 집권하고 있다. 그나마 이들 세 나라 역시 중도 노선으로 모이는 모양새다. 스페인의 경우 사회노동당의 호세 루이스 사파테로 총리는 첫 번째 집권 때와는 달리 부유세 성격의 세금 폐지를 약속하는 등 좌파 노선을 일부 수정하면서 연임에 성공했다. 영국의 집권 노동당의 경우 이미 토니 블레어 전 총리 때부터 보수당보다 더 우파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는 분석이다.

파리=전진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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