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2. 시 - 김혜순'지평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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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누가 쪼개놓았나
저 지평선
하늘과 땅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로 핏물이 번져나오는 저녁

누가 쪼개놓았나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
바깥의 광활과 안의 광활로 내 몸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에서 눈물이 솟구치는 저녁

상처만이 상처와 서로 스밀 수 있는가
내가 두 눈을 뜨자 닥쳐오는 저 노을
상처와 상처가 맞닿아
하염없이 붉은 물이 흐르고
당신이란 이름의 비상구도 깜깜하게 닫히네

누가 쪼개놓았나
흰 낮과 검은 밤
낮이면 그녀는 매가 되고
밤이 오면 그가 늑대가 되는
그 사이로 칼날처럼 스쳐 지나는
우리 만남의 저녁

<'문학동네' 2004년 봄호 발표>

◇ 약력
-1955년 경북 울진 출생
-79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시집 '한 잔의 붉은 거울' '불쌍한 사랑기계'
-97년 김수영문학상, 2000년 소월시문학상
-미당문학상 후보작 '지평선' 외 14편

시인 김혜순씨는 2001년 제1회 미당문학상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최종심에 올랐다. 최근 1년간 발표한 15편 중 김씨가 독자에게 전문을 소개하기로 결정한 시는 '지평선'.

김씨는 그러나 시에 대한 설명을 부탁하자 난감해 했다. 시인 스스로 자기 작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설명해 의미를 확정하는 것을 극도로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시작 과정을 묻는 것으로 에둘러갔다. 김씨의 대답은 "시작 과정 역시 설명하기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어 "시란 내 몸의 전해질이 어떤 전극의 상태를 띨 때 씌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예민한 시인의 감성을 빗댄 것이겠지만 '몸의 전해질''전극의 상태'같은 표현은 모호하다. 김씨는 "슬픔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일종의 감정상태"라고 설명했다. 또 "언어가 언어 이전의 상태로 몸을 떠다니다가 언어화하는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에두른 길이 알고 보니 더 험난했다. 다시 '지평선'으로 돌아왔다.

그는 "굳이 설명하자면 경계를 허물려고 했던 시 같다"고 말했다.

김씨의 설명에 따르면 하늘과 땅이 갈라진 흔적인 1연의 지평선과 역시 갈라진 흔적인 2연의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는 모두 상처의 다른 이름들이다. 김씨는 "'쪼개진 금'들의 자리인 갈라진 흔적, 상처들은 경계이기도 한데 경계는 다가갈 수 없다는 의미에서 가장 넓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상처는 상처와 맞닿아야 피가 솟고, 또 그게 우리들의 삶이다.

문학평론가 정효구씨는 "'지평선'은 김씨의 시 중 쉬운 편"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좋은 시인지, 나쁜 시인지를 가리는 판단 기준으로 '대상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이 얼마나 새로운가''새로운 인식을 얼마나 새로운 이미지로 표출했는가' 두 가지를 꼽았다.

정씨는 '지평선'이 좋은 시의 요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고 평했다. 우선 보통 사람이 지평선을 맞닿은 것으로 바라보는데 비해 김씨는 쪼개진 상태라는 데 주목했다. 또 갈라진 하늘과 땅,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에서는 핏물과 눈물이 번져 나온다.

정씨는 "이분법처럼 둘로 갈라진 것들의 통합은 불가능하고, 인간은 결국 그 단절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것 아니냐는 점을 보여주려 한 것 같다"고 풀이했다. 이어 "관습의 때가 묻은 언어, 일률적 교육에 의해 우리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것들을 우리 의식.정서에 균열을 일으켜 보여주는 게 김혜순의 장기"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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