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 중심 G8 저물고 ‘경제 다극화’ 시대 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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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미국 피츠버그 주요 20개국(G20) 3차 정상회의는 세계경제 질서의 판을 바꿨다.

이번 회의로 과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주요 8개국(G8) 시대는 저물었다. 대신 경제에도 선진국과 신흥국이 공존하는 다극화 시대를 열었다. 이번 금융위기가 이 같은 변화를 재촉했다. G8의 노력만으로 세계경제 위기 수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입증됐기 때문이다. 기후변화 협상도 신흥국의 협조 없이는 한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게 됐다.

변화를 주도한 건 미국이었다. 미국이 더 이상 ‘세계의 소비시장’이 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3차 회의에서 ‘지속 가능한 균형성장’이라는 새 틀을 만든 건 이 때문이다. 만년 경상수지 흑자국인 중국·독일·일본은 내수를 부양해 수입을 늘리고, 미국은 수출을 늘려 불균형을 해소하자는 얘기다.

이번 회의에선 각국이 이를 실천하도록 하는 틀도 만들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에 감시 역할을 맡겼다. IMF·IBRD가 세계 각국의 정책과 경제상황을 모니터링해 보고하면 이를 토대로 회원국 간에 상호 평가(peer review)를 한다는 것이다. G20은 국제기구가 아니어서 결의사항을 지키지 않아도 마땅한 제재방법이 없다. 대신 서로 간의 도덕적 압력으로 집행력을 확보하겠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선 IMF·IBRD 개혁이 불가피했다. 그동안 두 기구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하수인이란 지적을 받았다. 두 기구에 세계경제 감시 역할을 맡기자면 신흥국 입장을 더 반영해야 했다. IMF와 IBRD 지분을 각각 5%와 3% 이상씩 개도국에 더 배정하기로 한 건 이런 이유에서다. 유럽이 거세게 반발했지만 미국이 밀어붙였다.

대신 신흥국의 책임도 무거워졌다. 기후변화나 무역자유화 협상에서 신흥국 프리미엄을 계속 고집하기 어렵게 됐다.

미국과 유럽이 대립해온 금융 개혁은 양쪽이 한걸음씩 물러나 절충했다. 유럽은 금융회사 임직원 보너스에 상한선을 두자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번 회의에선 상한선은 두지 않기로 했다. 대신 미국 주장처럼 보너스 정보 공개와 같은 간접적 규제 대신 장기 실적에 연동된 직접 규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은행 자본 확충과 관련해선 미국이 공세를 폈다. 대형은행일수록 더 많은 자본을 확충하도록 하자고 밀어붙였다. 자기자본도 언제라도 현금화할 수 있는 핵심자본(Tier 1)이 많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럽은행이 자본력에서 상대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유럽은 이에 반대했다. 결국 자본은 확충하도록 하되 미국이 주장한 강력한 조치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기후변화 역시 딱 부러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미국은 12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리는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회의에서 채택할 결의안 초안을 이번 회의에서 이끌어내려 했으나 중국의 거센 반대에 막혔다. 화석연료에 대한 보조금을 없애자는 안을 넣긴 했으나 시한을 못 박지 않아 사실상 구호로 그쳤다는 지적도 있다.

일각에선 G20에 너무 많은 국가가 참여한 데다 선진국과 신흥국의 입장이 서로 엇갈려 결국 유엔처럼 말만 많고 실천은 없는 공허한 기구가 될 거라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세계경제 다극화로 선진국이든 신흥국이든 한쪽만으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없게 된 이상 G20은 피할 수 없는 대세라는 분석이 더 많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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