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검제 논란사] 88년 DJ 첫 법안 발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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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특별검사제는 정권에 관계없이 야당이 늘 도입을 주장하고 여당은 '거부' 하는 형태를 반복해 왔다.

부천서 성고문사건과 박종철 (朴鍾哲) 군 고문치사사건 등 시국사건을 거치며 시작된 특별검사제 공방이 법안의 형태로 처음 발의된 것은 88년. 김대중 대통령이 총재로 있던 평민당이 그해 12월 광주 민주화운동사건 등과 관련, '특별검사제 임명과 직무 등에 관한 법률안' 을 발의한 이후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입법화 논의가 진행된 것은 95년 말 당시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이 '5.18 특별법' 을 제정, 역사 바로세우기에 나서면서부터다.

당시 야당 및 재야는 "12.12와 5.18사건을 불기소한 검찰에 역사 재판을 맡길 수 없다" 며 특별검사제 도입을 강력 추진했지만 여당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후 특검제는 슬롯머신 사건,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 등 권력형 비리 사건이 터질 때마다 단골 메뉴로 등장했다.

국민회의는 야당시절이던 96년 특검제 도입과 비리조사처 설치 등을 골자로 한 부패방지법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했지만 여당인 신한국당의 반대로 상정조차 못했다.

이런 사정은 새 정부 들어서도 마찬가지. 지난해 2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특별검사제 도입을 1백대 과제 중 하나로 선정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야당시절 특검제 법안의 설계자였던 박상천 (朴相千) 전 법무장관은 입장을 바꿔 강경한 도입 반대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검찰' 시비와 대전 법조비리, 진형구 전 대검 공안부장의 설화 (舌禍) 등 잇따른 악재가 결국 특별검사제를 수용하도록 하는 계기가 됐다.

한편 '워터게이트' 로 시작, '지퍼게이트' 로 막을 내렸다는 말을 남긴 미국의 특검제는 지난달 수명을 다했다.

73년 워터게이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특별검사로 선임된 하버드대 법대 교수 아치볼트가 해임된 후 이에 대한 반성으로 78년 '독립검사법' 이 5년 한시법으로 제정돼 지금까지 세번 연장됐다.

20년간 이 법이 적용된 경우는 모두 18건으로 클린턴 행정부에서만 7건. 그러나 무소불위의 권한 및 지나친 예산낭비에다 공정성과 정치적 중립성마저 의심받으면서 역사 속의 제도로 사라졌다.

이상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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