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개사 “보증서 못 받아 39억 달러 해외 수주 실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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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호 28면

해외 건설 일감을 따내려면 보증이 필요하다. 입찰 보증, 선수금 보증, 공사 이행 보증, 하자 보증 등 갖가지 보증서류를 내밀어야 해외 발주처가 믿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건설사는 보증을 쉽게 받을 수 없다. 금융기관이 보증을 꺼리기 때문이다. 위험 관리를 잘못한 기업에 돈을 더 빌려 주는 것인 데다 부실화에 대비해 쌓는 대손충당금(19% 이상)이 부담돼서다. 이에 따라 보증을 받으려는 워크아웃 건설사와 이를 회피하는 보증기관, 양측을 조정하는 주채권은행, 감독기관까지 보증서 발급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올 초 1차 워크아웃 대상에 선정된 건설회사들의 회생 작업도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워크아웃 건설사, 보증기관과 힘겨루기

당장 뿔이 난 쪽은 워크아웃 건설사다. 두 달 전부터 청와대와 정부 부처를 찾아다니고 있다. 채권단 설득이 어려워지자 ‘장외 플레이’에 들어간 것이다. 이들은 올 7월 17일 보증서가 발급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며 청와대·국토해양부·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에 동시다발로 건의서를 냈다. 풍림산업·경남기업 등 7개 워크아웃 건설사는 올해 해외 공사 입찰에 나섰으나 보증서를 받지 못해 수주에 실패한 사례만 7건, 공사금액 기준 39억2500만 달러(약 4조7100억원)에 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애초 정부는 회생 가능한 기업은 적절한 지원을 통해 살리겠다고 공언했으나 실제로는 금융기관이 보증을 안 해 줘 사업 기회를 잃고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도 채권단에 협조 공문을 보내는 등 지원사격을 했다. 기획재정부가 지난달 11일자로 채권단에 보낸 협조 요청 공문엔 ‘사업성 평가를 통해 보증서 발급 여부를 결정하되 해당 기업의 영업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신속하고 투명한 의사 결정이 이뤄질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적고 있다.

김선병 대외경제총괄과장은 “금융위의 요청으로 수출입은행 등에 협조 공문을 보냈다”며 “무조건 보증서를 발급하라는 건 아니고 사업성을 검토해 결정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수출입은행 관계자는 “여러 곳에서 협조 요청을 받았다”며 “보증을 하지 않아 해외 수주 기회를 빼앗기지 않도록 다각도로 해법을 찾아봤다”고 밝혔다.

그러나 규정에 정한 신용한도를 초과해 지원하기가 쉽지 않다는 게 은행 측 설명이다. 신용등급이 낮은 워크아웃 기업에 추가로 돈을 빌려 주려면 담보 등 위험 방어장치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수출입은행은 대안으로 채권단 공동으로 손실을 분담하는 방안을 내놨다. 과거 외환위기 때 비슷한 방식으로 지원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실 분담을 받아들이는 금융회사는 보증이 부실화할 경우에 대비해 대손충당금을 쌓아야 한다. 그 자체가 금융회사들로선 부담이다. 채권단은 손실 위험만 지는 것은 부당하다며 수출입은행의 제안을 거부했다. 수출입은행 관계자는 “사후 채권단 손실 분담을 논의한다는 주채권은행의 공문만 있어도 보증을 해 주겠다고 했으나 주채권은행이 들어 주지 않아 못했다”고 말했다.

‘워크아웃 헌법’에 해당하는 ‘경영정상화 이행약정’은 신규 보증 지원에 관해 명확한 규정을 두고 있다. 수출입은행·수출보험공사·서울보증보험 등 보증 금융기관은 신규 보증을 요청받으면 ‘적극 협조’하거나, 보증을 하지 않을 경우 협의회의 신규 자금 지원에 대한 손실분담확약서를 제출한다는 내용이다. 보증기관들이 신규 보증서를 무조건 발급해 줘야 할 의무는 없다는 얘기다. 따라서 워크아웃 기업의 요구대로 금고 문을 무한정 열어 줄 수는 없다는 것이 보증기관의 입장이다.

금융위나 금감원은 워크아웃 기업이 채권단과의 신뢰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워크아웃 기업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채권단을 설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들은 국내 건설시장이 막힌 만큼 해외 수주를 늘려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채권단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2~3년치 일감이 있으므로 해외 사업의 외형을 키우기보다는 내실을 다지며 경쟁력을 키우는 게 바람직하다는 게 채권단의 생각”이라며 “채권단의 결정을 정부나 감독기관이 나서서 뒤집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A사 관계자는 “채권단이 신규 보증을 해 주지 않는 것은 국가적으론 외화 획득 기회를 잃는 것이요, 기업 입장에서는 경영 정상화 기회를 놓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워크아웃 기업들은 과거 현대건설의 사례를 자주 인용한다. 해외 공사의 경우 보증한도를 초과하더라도 손실 분담 비율을 수출입은행 30%, 수출보험공사 70%로 정해 보증서를 발급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현 정부의 워크아웃이 10년 전 김대중 정부의 워크아웃보다 못하단 말이냐”고 반문했다.

외환위기 당시 워크아웃 사령부인 기업구조조정위원회 사무국장을 지낸 이성규 민간 배드뱅크 대표 내정자는 “당시엔 워크아웃 기업을 회생시키는 게 서로에게 윈-윈이라는 공감대가 있었다”며 “이에 따라 손실을 공정하게 분담한다는 조건으로 신규 보증을 처리한 사례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려면 워크아웃 기업을 살리지 못하면 채권단도 죽는다는 절박함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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