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하고 지겹고 괴롭고 찌질한 ‘오, 사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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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호 04면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 그 실체가 얼마나 지겹고 초라한 것인지, 그 아픈 바닥을 보여주는 연극이다. 뒷맛이 깊지만 쓸쓸하다. 제목의 분위기에 끌려온 관객들이라면 당황할 법도 하다. 낭만과는 거리가 먼, 냉정한 사랑 이야기다.등장 인물은 모두 아홉 명. 그중 세 쌍이 현재 연인이다. 한 쌍은 불륜이고, 한 쌍은 집착이고, 한 쌍은 이제 시작이다. 그리고 나머지 중 두 사람은 일방적인 짝사랑에 몸이 단다.

연극 ‘춘천거기’, 서울 충무로 명보아트홀, 11월 22일까지, 문의 02-586-3612

설레고 재미있는 사랑은 막 시작한 사랑뿐이다. “너를 처음 본 순간 달 토끼 방아 찧는 소리가 여기서 들려서 내 심장이 여기 있다는 걸 알았고…” 식의 낯간지러운 고백이 통하는 때다. 극중 희곡작가 수진의 대사에 따르면 “참 반가우시면서도 두려운 손님”이 오셨고, “그 손님이 날 울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라 손바닥만 한 두려움이 있지만, 첫 잔의 달콤함에 술잔은 비워지고 결국 만취돼 두려움은 잊을 것”이다.

가장 암담한 사랑은 집착이다. 대학 선후배 사이인 영민과 세진. 영민은 세진의 ‘과거’를 안다. 세진의 첫 남자가 영민의 선배다. 세진에겐 과거일 뿐인 일이 영민에겐 아직도 진행형이다.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세진의 과거. 영민은 그때마다 꼬투리를 잡고 싸움을 건다.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폭력을 쓰고, 울고, 술을 마시고… 그러다 “잘할게” “정말 마지막이야”를 주고받으며 화해를 한다. 반복되는 악순환이다. 누가 봐도 “헤어져라”가 정답인데, 두 사람은 그러질 못한다.

불륜 역시 답이 없는 사랑이다. 대학 강사 선영은 유부남인 명수와 위험한 사랑을 선택했다. 불륜 속엔 죄책감과 질투심이 공존한다. “누군가한테 상처 주고 있으면서 상처받기 싫어하는 내가 너무 싫어. 무섭고 징그러워.” 선영의 절규다. 달콤한 만큼 괴로운 사랑이다.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불이 꺼진 무대. 사뭇 숙연해진 객석 위로 이승철의 ‘사랑 참 어렵다’가 흘러나왔다. “사랑 참 어렵다 어렵다 많이 아프다…” 다양한 사랑의 실체와 맞부딪친 관객들의 표정이 복잡했다. 저마다 제 사랑을 돌아보며, 그토록 찌질한 사랑에 그래도 목매야 하는 이유를 찾아보게 된다.

‘춘천거기’는 2005년 초연 이후 2006년 올해의 예술상 수상작, 2007년 ‘올해의 예술축제’ 초청작 등으로 선정되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연극이다. 특히 올해 공연에선 기상캐스터 안혜경이 초보 연인 주미역으로 더블캐스팅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한길 작ㆍ연출, 최광일ㆍ김지성ㆍ유지수 등 출연. 입장료 2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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