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사로 변한 '감초' 명계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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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99년 여름, 이 남자가 사는 법? 그건 '투쟁' 이다. 박박 깎은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그는 외친다.

"나에게 영화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 영화인들의 스크린쿼터 (한국영화 의무 상영일수) 축소 반대 시위와 단식농성으로 얼룩진 지금 이 땅의 서울 한복판. 아스팔트를 지글지글 녹이는 땡볕에 서서 한국영화의 생존권을 외치는 그 사람은 영화배우 명계남 (47) 이다.

지난해도 그랬듯이 올해도 그는 늘 영화인들의 '스크린쿼터 지키기' 시위현장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지난달 24일 임권택 감독이 삭발을 하던 날, 5분여 동안 진행된 그 엄숙한 의식을 눈물바다로 만든 게 바로 그였다.

명씨는 말한다. "내 한 몸 부스러져서라도 한국영화를 지킬 수 있다면 그것으로 내 역할은 다 한 것" 이라고. 그 길이야말로 '문화주권' 을 사수하기 위한 최소한의 봉사라며 명씨는 힘 주었다.

'투사' 명계남은 흔히 '한국영화의 검인 (檢印) 배우' 로 불린다. 아무리 작은 단역이라도 출연제의를 거부한 적이 없어 "한국영화는 명계남이 나오는 영화와 나오지 않은 영화로 구분한다" 는 우스갯소리까지 나돌 정도.

94년 데뷔작인 '그 섬에 가고 싶다' 에서부터 지금 상영중인 '이재수의 난' 까지, 남작 (濫作)에 가까운 마구잡이 출연에 대해 그는 "배우는 '큰 배우' 와 '작은 배우' 가 있을 뿐 '작은 역' 과 '큰 역' 은 없다" 고 말한다. 작은 역으로도 얼마든지 큰 배우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만년 단.조역에 머물던 명씨가 '이재수의 난' 에서는 첫 주인공급을 맡았다. 제주 대정군수 채구석 역. 명씨는 20세기 초 변방의 한 개혁주의자였던 그에게 자신의 현실적 정체성을 투사해 좋은 연기를 펼쳤다. 명씨는 "그 채군수의 심정을 알 것 같다" 고 말했다.

연세대 대학극 출신인 명씨는 회사를 다니다 뒤늦게 40대에 연극계로 돌아왔다. 대학로에 극단 완자무늬를 만들어 패트릭 쥐스퀸트의 '콘트라베이스' 등을 1인극으로 선보였다. 그러나 완고한 연극계 풍토에서 명씨는 늘 '주변인' 이었다.

'삐딱한' 천성 탓에 다소 보수적인 연극계에서 배척을 당했던 것. 명씨는 이런 억눌림을 보다 활동적인 영화판에서 풀어냈다. 지금도 단짝인 영화배우 문성근 (영화진흥위원회 부위원장) 이 그를 영화계로 끌어들였다. 물 만난 고기처럼 명씨는 영화계를 휘저었고, 이젠 '초록물고기' 등을 만드는 등 영향력 있는 제작자 (이스트필름) 로도 성공했다.

" (감독들이) 나를 쓰겠다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출연료에 대한 욕심도 없다. 주는 대로 받을 뿐이다. " 명씨의 자유로운 영혼이 지금 스크린쿼터 축소 문제로 상처받고 있는 것이다.

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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