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음모론이 판치는 까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음모론 (conspiracy theory) 의 유래는 셰익스피어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비극 '줄리어스 시저' 에서 브루터스는 "오, 음모여, 그대의 위험천만한 눈썹을 부라려다오. 온갖 악 (惡) 들이 활개치는 밤에…" 라고 외쳤다.

음모의 음흉함과 그것이 뿜어내는 상상력은 지나간 역사를 다시 쓰고도 남는다.

2차대전을 유발한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은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부러 유도했다는 설 (說) 도 있다.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은 물론이고, 70년대 석유위기도 석유메이저들의 음모로 치부되기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한국의 국제통화기금 (IMF) 사태마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금융자본의 '한국 길들이기' 음모라는 시각도 없지 않다.

당시의 로렌스 서머스 미국 재무부부장관은 일명 '맥아더 점령사령관' 으로 불리기도 했다.

미궁의 사건, 그리고 주어진 설명만으로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을 때 음모론은 고개를 든다.

그러나 거대한 음모론 치고 그것이 사실로 입증된 경우는 드물다.

하나의 가설로 상상과 추론의 영역에 머무른다.

그러면서도 음모론이 끈질긴 생명력을 갖는 것은 '충분히 그럴 만하다' 는 개연성 때문이다.

'총풍' 에 이어 '4대의혹' 이다, '신북풍' 이다 해서 우리 사회는 온통 의혹과 음모론으로 들끓고 있다.

경제위기 타개나 구조개혁은 뒷전이고, '국민적 의혹' 앞에 '한국의 냄비' 는 쉬지 않고 달아오른다.

1차적 책임은 '오이밭에서 갓끈을 고쳐 맨' 국민의 정부다.

싱크대 여닫이에서 1백만원 돈다발들이 굴러떨어지고, 공안책임자의 대낮 '취중호언' , 게다가 '무덤까지 갖고 가야 할 얘기가 있다' 는 여권내 자중지란 (自中之亂) 성 발언으로 미루어 의혹의 소지는 누가 봐도 역력했다.

그럼에도 진상조사나 납득할 만한 해명, 그에 따른 신속한 문책조치를 미적거림으로써 사태를 덮으려 했다.

음모론의 창궐에 이 이상 좋은 토양도 없다.

야권 또한 냉철한 진상규명보다 집권층에 결정타를 가하기 위한 정략적 여론몰이에 급급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 과정에서 음모론은 증폭.확산되고 정부 발표를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 극도의 불신풍조를 몰고 왔다.

그 음모론의 극치가 '신북풍' 이다.

남북한 당국이 서해 교전을 사전에 짜고 '연출' 할 정도라면 남북관계는 무얼 더 걱정하랴. 그렇다면 이 '연출' 에 동원돼 희생까지 당한 군장병들은 무엇이며, 거기에 '놀아난' 언론과 국민들은 또 뭔가.

'일부 국민 여론이 그렇다' 는 무책임한 말로 해명될 사안은 아니다.

음모론에도 나름대로 논리와 그럴싸한 정황이 있어야 한다.

음모론의 득세는 곧 그 사회 건강에 대한 적신호다.

음모론이 '믿거나 말거나' 를 넘어 작의적인 '여론몰이' 에 업히는 경우가 가장 고약하다.

여론조사는 여론을 끊임없이 과장하는 속성이 있다.

의견을 갖지 않은 사람에게 문제의 중요성을 주입시키며 의도된 방향으로 몰고 간다.

실체가 없는 의혹이라도 미디어 등을 통해 계속 제기하면 일반은 '의혹' 쪽으로 기울게 된다.

개혁에의 발길이 바쁘고, 아직도 갈 길이 먼 상황에서 이런 국력의 소모도 없다.

그래서 서해 교전 발발 직후 우리 국민들과 시장이 보여준 신기할 정도의 침착함과 안정은 더더욱 돋보인다.

'햇볕정책의 실패' 로 당장 어떻게 될 것 같은 위기상황에 아랑곳없이 우리의 자신감과 의연함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국민의 의식이 정치권보다 더 성숙해 있다는 의미도 된다.

DJ정부는 개혁에 앞서 음모론의 악순환으로부터 우리 사회의 건강을 되찾아야 한다.

음모론의 빌미나 온상을 서둘러 제거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DJ 자신이 마음을 비우고 개혁의 초심 (初心) 으로 돌아가야 한다.

경제위기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개혁을 통해 경제를 반석 위에 올려 놓았다는 단 한가지만으로도 DJ정부의 평가는 족하다.

내각제 단안도 빠를수록 좋다.

외교.국방 등 국가적 중대사안은 초당적 협의를 제도화해야 한다.

또 국정의 의사결정 및 운영과정에 최대한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

선진국과 같은 배경설명 브리핑을 정례화해 특히 언론의 이해를 높여야 한다.

뒤늦게 민심과 여론에 지나치게 영합함은 도리어 개혁을 그르친다.

'파괴적 민심' 도 적지 않고, 여론의 요구에 꿰맞추는 통치는 리더십이 아니다.

개혁은 고독한 과업이다.

영국 대처 총리는 개혁과정에서 지지율이 영국 역사상 최저인 15%까지 떨어졌었다.

설득을 통해 이끌어야 하고, 밀어붙일 때는 밀어붙이되 그 결과와 역사에 책임지는 자세가 중요하다.

변상근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