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변창섭 '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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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어릴 때 형제를 갖고 싶었지만

형제 없이 자랐다

촌부의 아들이기를 원했지만

소시민의 부모를 두었다

문과대학을 다니고 싶었지만

공과대학을 졸업했다

국군 정훈대를 원했지만

미군 카투사로 제대를 했다

비구승이 되고 싶었지만

결혼하여 아이를 갖고 있다

바닷가 내 고향에서 살기 원했지만

지금 이국의 벌판에 서있다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지금 시를 쓰고 있다

다 커서 안 일이지만

나는 형제가 열둘이나 있다.

- 변창섭 (53) '후기'

오늘 아침 시집 '잔이 잔이 되게 하라' 라는 시편들을 읽다가 그 끝의 후기가 인상에 지워지지 않았다.

한용운은 '님의 침묵' 후기에 해당하는 '독자에게' 에서 '새벽 종을 기다리면서 붓을 던집니다.

을축 8월 29일' 이라고 맺은 게 떠오르는데 정작 이 '후기' 는 시인의 생애가 다 담긴 진술이다.

읽고 나니 웬만한 시보다 더 시였다.

어린 시절의 동경과 그 동경에 한결같이 어긋난 현실의 역정이 아무런 회포도 없이 보인다.

이만한 재능이면 튼실한 기품이다.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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