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저절로 켜지고 자동차 급발진…전자파는 도깨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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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김모 (56.주부.서울강남구 압구정동) 씨는 최근 이상한 일을 겪었다. 틀림없이 끄고 난 뒤 잠들었던 TV가 밤사이 켜져 있었던 것. 주변 아파트 주부들에게 물어보니 TV뿐 아니라 에어컨이나 라디오 같은 전자제품들이 저절로 켜졌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전자파로 인한 자동차 급발진 논란이 일면서 전자파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늘고 있다. 알고 보면 전자파는 자동차 전자계통에 뿐 아니라 전자제품 전반에 오작동을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사람의 건강도 해친다. 송전탑이나 휴대폰, 컴퓨터 모니터 등에서 나오는 전자파가 얼만큼 유해한지를 놓고 논쟁이 한창이다.

전자파란 전기 및 자기의 흐름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전자기 에너지. 전기장과 자기장이 서로 엉키면서 퍼진다.

전자파는 자연에도 들어있다. 빛.적외선.자외선도 알고보면 전자파의 일종. 지구도 자체에서 전자파를 발생시킨다.

북극.남극을 흐르는 지구 자기장은 직류 자기. 세기가 시간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이는 태양으로부터 오는 빛의 전자파도 마찬가지. 그래서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이 모두 지금까지 잘 적응해 왔다.

전파연구소 전파환경연구과 오학태 (吳鶴泰) 박사는 "요새 전자파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인공적으로 전자파를 발생시키는 교류자기 발생원이 주변에 많이 생겼기 때문" 이라고 설명한다.

전자파는 거리가 멀어질수록 급격히 약해지는데 가까운 곳에 전자파 발생원이 우글우글 해진 것. 연세대의대 의학공학교실 김덕원 (金悳原) 교수는 "전자파를 만들어내는 물질은 1초에 몇십 번에서 수백만 번까지 극성을 바꾼다. 바로 이 주파수에 따라 종류가 나누어진다" 고 설명한다. 극저주파.라디오파.마이크로파.적외선.가시광선.자외선.X선.감마선 순으로 주파수가 높으며 주파수가 높을수록 파장이 짧고 에너지가 세다.

이런 전자파들이 어떻게 한밤중 TV와 에어컨.라디오를 키는 '요술' 을 부릴까. 한국전기연구소 전기환경연구팀 명성호 (明聖鎬) 박사는 "리모트 컨트롤에서 나오는 전자파는 적외선이어서 요새 문제가 되는 휴대폰 등 각종 전자기기에서 발생하는 전자파와는 주파수대가 다르다" 고 설명한다.

하지만 강도가 센 전자파가 직접 TV나 에어컨 등의 내부회로 구동에 침입한다면 저절로 켜지거나 채널이 바뀌는 '요술' 이 불가능하지 만은 않다는 것. 하지만 아직 어느 정도의 주파수와 세기의 전자파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는 지는 실험적으로 입증된 바 없다.

한편 초고주파인 마이크로파나 상대적으로 주파수가 높은 휴대폰 전자파 등은 인체 조직의 온도를 높여 인체에 유해하다는 것이 어느 정도 입증된 상태.

연세대의대 金교수는 "최근 전자파 연구의 뜨거운 논쟁은 고주파 이외에도 저주파가 세포막 사이의 이온의 이동에 작용해 신체의 면역시스템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라고 들려준다.

그러나 주파수와 노출시간, 노출량 측정을 고려한 역학조사가 까다로워 얼마나 강한 전자파를 얼마동안 쬐야 해로운지 학자들간에 첨예한 의견대립을 보이고 있다.

분명한 것은 전자파가 인체에 해롭다는 것. UN산하 국제암연구기구 (IARC) 는 지난해 전자파를 발암인자 2등급으로 분류, '발암가능성이 있는 물질' 로 규정했다.

金교수는 "전기장은 전자파 발생원에 고압부가 있는 경우 강해지고 자기장은 흐르는 전류크기에 비례해 커진다 "고 말했다.

주변 전자기기 중 TV나 컴퓨터 모니터 등은 전기장이 강하고 모터가 달린 전기면도기.청소기.헤어드라이기.프린터기 등은 자기장이 강하다는 것. 전기장은 피부노화를 빠르게 하고 습진.건선 등의 피부질환을 유발할 수 있고 자기장은 백혈병을 유발한다는 주장이 있다.

金교수는 "이 두 가지가 상승작용을 일으키면 백혈병 유발률도 높아진다는 연구결과도 있었다" 고 들려줬다. 인간이 만들어낸 각종 기계들은 편리함을 주는 대신 그 대가를 요구한다는 사실이 전자파에서도 입증되는 셈이다.

최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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