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38.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제9장 갯벌

그녀와 약속된 장소는 바이산다샤 곁에 있는 로터리를 돌아 옌지허 (延吉河) 를 건넌 옌지빈관 (賓館) 의 카페이팅 (가배廳) 이란 이름의 커피숍에서였다. 그녀는 약속했던 시각에서 십여분 늦게 커피숍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세 사람은 물론 그녀의 인상착의 같은 것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여자가 도어를 밀고 커피숍으로 들어섰을 때, 그들과 통화했었던 장본인이 그녀라는 데 의심을 두지 않았다. 그녀의 동작에서 풍기는 친근감 때문인지 몰랐다. 연두색 투피스 차림인 그녀의 옷차림은 요란하지 않았지만 군더더기가 없고 세련되어 있었다.

스커트 자락 아래로 드러난 미끈한 각선미로 보아선 한족 (漢族) 여자로 착각할 수도 있었다.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방울을 훔친 그녀는 세 사람에게 명함을 건네 주었다. 김승욱 (金承煜) 이었다.

"조여사로부터 소개받았을 때는 남자분인줄 알았습니다. " "이름만 보고 찾아오시는 분들은 응당 남자로 착각들 하세요. " 여러 번 겪은 일인 듯 그녀는 발쑥 웃어 넘겼다.

그러나 억양조차 서울말씨였으므로 세 사람은 속으로 다시 한번 놀랐다. 그녀는 그 낯섦도 눈치챈 듯 서울에서 일년 넘게 불법체류하다가 2년 전에 돌아왔다는 말을 덧붙였다.

"닭 잡는 집에서도 일을 했었고,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기도 했었어요. " "불법체류를 했다면, 괄시를 톡톡히 받았겠습니다. " 대꾸는 않고 또 다시 배시시 웃기만 했다. 조여사를 알게 된 것은, 조여사의 이웃이었던 한식당 종업원으로 일할 때부터였었다.

얼굴의 윤곽도 전화에서 들려왔었던 목소리처럼 또렷했고, 예절 발랐다. 서울 식당음식의 맛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근처의 식당으로 안내하겠다고 나섰다. 식당은 옌지빈관에서 걸어서 이십여분 거리에 있었다.

"거리에서 풍기는 냄새가 서울과는 다르지요? 이제 냄새부터 익숙해져야 할 거예요. " "솔직히 말씀드리면, 우린 서울과는 상관없이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시골생활만 했었지요. 조여사를 알게 된 것도 사실 며칠 되지 않습니다. "

"알고 있어요. 조여사님 전화를 받은걸요. " "서울 있을 때 불법 체류하는 연길서 온 여자 티를 내지 않으려고 억양 열심히 배웠죠. " 그녀와 태호가 앞장서고 두 사람은 서너발짝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옌지빈관에서 그녀를 만난 이후부터 줄곧 두 사람만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고 있을 뿐, 봉환이나 손씨는 끼어들 말미를 주지 않았다.

그런 대화 구도가 탐탁지 않았던 봉환은 걸음을 빨리하여 앞장선 두 사람 사이에 냉큼 끼어들었다.

"태호 봐라. 우리 둘은 빼놓고 니하고만 이바구해서 되겠나? 김승욱씨 보소. 우리 가지고 온 견본품 보기나 했어요?" "그렇게 서두르시면 안돼요. " "우리는 바쁜 사람들 아이겠습니껴. 여행경비도 많은 사람들이 아이고요. "

그때였다. 그녀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서서 봉환을 바라보며 난색이었다.

"그렇게 서두르시면, 성사되는 일이 없는데…. 중국 와서 그렇게 서두르시면 곤란해요. "

"견본품이라 해봤자 단추 몇 개 아이겠습니껴. 그거 보고 주문할낀가 말낀가 결정하는데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말입니껴? 중국 풍속이 시를 위중하게 여긴다는 말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만, 단추 몇개 팔아 먹자는데도 만만디를 들고 나오면, 우리 같은 사람은 속에 천불이 나서 장사 못해먹습니대이. "

"그렇지만, 어떻게 하시겠어요. 중국에 오셨으면 중국 풍속에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장사하시려면, 무작정 기다리는 것부터 배우셔야 해요. "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