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마음까지 꿰는 남자, 그는 자유자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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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소설가 구효서씨는 탄탄한 문학 작업으로 2005년부터 주요 문학상을 연이어 받았다. [랜덤하우스 제공]

달리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내달리는 마라토너가 떠오른 이유는 뭘까. 구효서(52)씨의 신작 단편집 『저녁이 아름다운 집』(랜덤하우스)을 보면서….

스무 살도 넘게 차이가 나는 연상의 여인에게 불현듯 매혹되는 30대 남성이, 때론 실연의 상처를 떨치려 입술을 깨무는 20대 여성이 화자로 등장한다. 게임에 빠진 고교생은 물론이고 죽은 나무까지 작가는 화자로 삼는다. 중년의 남성 소설가가 지어낸 이야기란 사실을 잊고 빠져들게 만드는 솜씨만으로도 별 다섯 개를 받을 만하다.

단편 ‘사자월-When the love falls’의 주인공은 실연한 여대생이다. 남자의 ‘새 여자’는 그녀보다 두 살 어린 같은 학교 학생. 어차피 질 거라면 패배를 직접 확인하고 싶다며 주인공은 그 아이를 만난다. 그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까.

“그를 사랑해? 그가 널 사랑한댔니? 어떻게 만났는데? 나에 대해선 얼마나 알고 있지? 잤……니? 취소, 취소, 취소. 종이를 접고 또 접듯, 줄지어 일어나는 의문들을 접었다.”

게임에 빠진 고교생이 화자로 등장하는 ‘막내고모’는 또 어떤가. “좋아. 독화살에 강력한 마력! 놈의 심장에 록온. 음, 놈도 체력이 많이 떨어졌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장검 공격! 점프, 뛰어, 뛰어, 뛰라니까. 피해야지, 씨불. 뭐야? 또? 다시. 아니, 아니, 아니라니까. 아니이이이!” 부부싸움 후 피신 온 막내고모와 청상과부 엄마가 대대대대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주인공은 “이 게임 완전 사기”라 툴툴거리면서도 “에니미가 너무 멋있어서 매번 지고도 미워지지 않는” 게임에 매달려 99전 99패를 기록한다. 언뜻 의미없이 이어지는 듯한 게임 장면은 강력한 맞수이면서도 서로 의지하는 고모와 엄마의 모습에 절묘히 맞물린다.

‘TV, 겹쳐’의 화자는 중졸인 형이 최고학력인 가난한 집 막내로 태어나 고졸이 될 뻔했으나, 사고로 정신연령이 13세에서 멈춘 어른이다. “지능이 열두 살이랬다. 좆도, 그것밖에? 내가 성질을 부리자 의사는 한 살 더 올려주었다. 늙어가는 열 세 살이다.” 그 열 세살의 시선으로 죽은 누이의 일생을 말한다. 열 여섯에 공순이가 됐으나, 부모님 몰래 치른 중학교 입학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할 정도로 똑똑했던 누나는 노동운동에 투신하고 이주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싸웠다. 열 세 살의 눈엔 “돼지처럼 (경찰한테) 질질 끌려가는 모습은 좀 그랬어도, 누나가 테레비에 나온 게 신기했”을 뿐이지만.

자유자재로 화자를 변신시켜가며 담아낸 이야기는 모두 7편. 살기 위해 자식을 죽여야 했던, 가난한 시대의 서사를 통해 죽음을 들여다본 2006년 황순원문학상 수상작 ‘명두’도 포함돼 있다. 조율이 완벽히 된 피아노를 칠 때 피아노라는 사물은 사라지고 음만 남는다(’조율-피아노 월인천강지곡’). 글쓴이는 사라지고 이야기만 남는 경지, 작가는 그걸 꿈꾼 게 아닐까. 죽음과 이별, 상처가 그려낸 풍경이 아름답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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